[아무튼, 스쿼시] 나는 선방했다
나는 스쿼시 선수가 아니다.
대회 경험도 고작 한 번에 그것도 상대에게 큰 데미지를 남기지 못하고 광탈했다. 이런 내가 스쿼시에 대해 써도 될까 고민했다. 그래도 스쿼시를 좋아하는 마음 만큼은 어디에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영원한 짝사랑'처럼 느껴지는 이 운동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스쿼시를 처음 시작한 게 2016년이니 올해로 5년이 됐다. 근데 왜 "구력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ㅎㅎ
나는 스포츠라면 빠지기 아쉬울 정도로 잘하고(?) 또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남자아이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축구를 했고, 6학년 땐 육상부이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체력장에선 늘 1급을 받았다. (괴로웠던 유연성만 빼고 펄펄 날아다녔다.)
성인이 되고서도 운동신경은 죽지 않았다. 회사 새내기 시절, 노사 체육대회를 휩쓸며 MVP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다음날 근육통에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지만...) 이런 내가, 왜 스쿼시에는 이렇게 젬병인 기분인 걸까. 운동을 하면서 '나는 소질이 없나봐'라는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을 5년째 하고 있으니 짝사랑도 이렇게 지독한 짝사랑이 없다.
스쿼시를 배우기 시작한 5년 전, 수업이 있는 월수금엔 약속도 잡지 않았다. 맥주를 3000cc씩 마시던 내가 술도 먹지 않았다. 스쿼시를 잘 하려면 간을 보호해야 하니까. 헬스를 한 달 끊어놓고도 열 손가락 꼽히게 갈까말까 하던 내가 근력 운동까지 매일했다. 스쿼시를 치려면 근력이 좋아야 하니까. 이런 애절한 짝사랑에도 스쿼시는 아주 넓은 계단식으로 나아지고 있다. 유~지→잠깐 쉬면 다시 제자리→또 유~지→아주 약간 레벨업. 그래도 나아지고 있으니 다행이다(이것도 짝사랑의 콩깍지인가).
승부욕에 불타던 나는 스쿼시를 만나 '승부욕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지면 화가 나니까 애시당초 컴퓨터 게임도 하지 않던 나인데, 스쿼시는 그런 불타는 승부욕으로는 도무지 계속 할 수 없는 운동이었다. 질 때마다 화가 났으면 나는 벌써 재가 됐으리라. 예전 성질머리(?)였다면 진즉에 스쿼시를 때려치웠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운동에서도 더 많이 사랑하면 약자인 것을...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9월 8일 편)에 장항준 감독이 나왔다. 스타 작가인 김은희 작가의 남편으로 많은 부러움(?)을 받으며 사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인생은 장항준처럼'이라고 말한단다. 그런 그에게 유재석이 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인생을 장항준처럼 사는 게 어떤 것 같나요?" 그러자 장항준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는 거죠. 항상 생각해요, 아 선방했다! 너무 위를 보지 않고 나를(나의 위치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 공도 직선으로 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칠 수 있게 된 건 엄청 선방한 거다! 안 되던 뒷볼이 되는 것도 선방이고, 어깨를 예전보다 더 돌리고 치는 것도 선방이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데 너무 엄격할 필요는 없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면 분명 노력하고 있다는 거니까. 긍정적인 마음으로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 조금 맘에 들지 않더라도 계속 하는 게 그만둬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니까.
인생도, 스쿼시도 장항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