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쿼시] 스쿼시 못 가면, 스쿼시 봅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 지난밤 EPL 경기 기사를 보거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곤 한다. 예전엔 아무리 ‘축덕’이라도 남의 경기 영상 보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었는데... 내가 요즘 그러고 있다. 난 스쿼시니까 일명 ‘스덕’.
PSA(Professional Squash Association, 프로 스쿼시 협회) 유튜브 영상을 시도때도 없이 튼다. 주 시청 시간은 자기 전이다. 스쿼시를 치고 와서 스쿼시 영상을 보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쇼파에 앉아 팡팡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심신에 안정이 찾아온다.
난 원래 운동을 '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몰입해 시청하는 건 국가대항전 축구경기 정도였고 나머지 경기는 실제 야구장이나 농구장에 가서 봐도 시큰둥했다. 대학시절 선배들이 축구부에 들어오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당시 여학생의 축구부 가입은 '축구부 매니저' 활동을 의미했다. '아니 내가 축구하는 거면 몰라도 왜 남의 경기 뛰는데 매니저를 해?'라는 생각에 거절했다. 월드컵, 올림픽 모두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만 내가 하는 동네 축구나 뒷동산 배드민턴보다는 못하다. 뭐든 직접해야 제맛인 거다.
그런 내가 스쿼시 영상에 빠지고 보니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하나만 봐야지 했던 게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결국 안 봤던 영상을 다 보고서야 끝이 난다.
심지어 영상 시청에는 또다른 '효용'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시뮬레이션 트레이닝이었던 것이다. 선수들의 스윙 자세와 폼, 스텝을 보면서 나와 비교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1년 차 풍월과 3년 차 풍월은 노랫가락부터가 달랐다. 1년 차엔 세게 치는 스윙만 보이더니, 3년이 되고 5년이 되니 단순히 휘두르는 게 아니라 정확히 잡고 탄력있게 뻗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엔 안 보이던 어깨돌림도, 스텝도 이제는 보인다.
그렇게 영상을 본 다음날이면 센터에 가서 머릿속에 저장해놓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다. 최대한 비슷하게. 코로나 확진자가 크게 늘거나 비가 많이 내려 스쿼시 센터에 못 가는 날이면 영상을 더욱더 열심히 시청했다. 이건 '시뮬레이션 트레이닝'이니까.
그렇게 몇 년을 보고 있자니 왕년에 날렸던 스타들의 플레이가 좀 떨어졌다 싶으면 내 가슴이 다 아프다.
과거 PSA 유튜브에서 엘쇼바기(Mohamed Elshorbagy)의 경기를 본다는 건 엘쇼바기가 '어떻게' 이기는지 보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까 그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결과이고 어떤 퍼포먼스를 보이며 이길지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스쿼시 선수인 그는 세계 랭킹 1위에 빛나는 전설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 6월 이집트의 떠오르는 신예인 아살(Mostafa Asal)에게 CIB PSA 월드 투어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독특하고 요란한 우승 퍼포먼스로 유명한 아살이지만 이날 만큼은 엘쇼바기에게 예의를 표했다. 아살은 경기 이후 본인의 SNS에 '10살 때부터 당신을 응원하기 위해 모든 토너먼트에 갔다'면서 엘쇼바기를 '나의 영웅, 나의 아이돌, 나의 롤모델'이라고 불렀다. 나에게도 그는 좋은 롤모델이었다.
엘쇼바기는 얼마 전 열린 US오픈스쿼시에서 결승에도 오르지 못하고 탈락했다. 늘려진 발과 정교함이 떨어진 스트로크를 보고 있자니 괜시리 울적해진다. '알렉산드리아의 야수'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이대로 지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나의 롤모델들을 만나러 TV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