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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21. 2023

한 번도 친구인 적이 없었던 진짜 친구

우리는 아웃사이더였다.

일찍이 애어른이 되어 있었다.

공부는 시시했고 주위의 친구들은 어렸다.

연예인 이야기는 심취해보려 했지만 취하기도 전에 싫증이 났고, 좋아하는 선배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멋지지 않은 선배들 투성이었다.

좋아하는 척은 쉬웠지만 정말 좋아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업 사이사이 껴있는 쉬는 시간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동참해야 해서 피곤했다.

차라리 몰래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 더 편했다.

몇 번쯤은 야자 시간에 도망치는 일에도 동조해야 했지만 이제야 밝히자면 사실,

나는 야자시간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누리고 싶을 만큼 좋아했다.

첫째로 집에 가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고, 둘째로 학습지 뒤로 몰래 숨겨서 야금야금 씹는 책 맛이 진미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편지를 쓰는 행복에도 빠져 있었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편지는 아웃사이더에게 쓰는 편지였다.

실제로 그 친구가 아웃사이더였나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공부를 정말 잘하고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은 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일 뿐이었으니까...

우리는 한 번도 같이 놀거나 대화를 하거나 혹은 따로 만난 적도 없다.

그저 일 년 동안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게 전부일 뿐이었다.

우리만큼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만 알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비루한 가정 얘기도 들었고, 공부에 대한 무력감에 대해서도 들었고,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사실 그녀가 아끼는 구절이라며 적어주는 글들은 하나같이 어두침침했고, 쓸쓸했다.

그러면 나는 그보다 더 건조하고 거친 글들을 적어 보내고자 노력했다.

밝음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 어둠이 아무렇지 않은 공간, 부정적인 사고가 특별하지 않고 별게 아닌 게 되도록 자꾸만 쏟아내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애써 밝아질 필요가 없는 시간이라 가장 편안했다.

마음껏 어두워서 우리는 오히려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단어들 사이에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았고, 캄캄해도 그 사이에서 머무는 게 좋았다.

이따금씩 그렇게 공부를 잘하면서도 나만큼 미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기도 했다.

누가 더 이름이 긴 작가를 찾아내나 내기라도 하듯 서로 더 긴 이름의 작가가 한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하고도 할 수 없었는데 오래도록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그게 또 별게 아닌 게 돼버려서 시시해지는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면 다른 어둠을 꺼내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친구 덕분에 그 시절을 비딱하게라도 건너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너한테도 내가 그랬을까.

학창 시절의 추억이란 게 딱히 없는데 너하고 주고받은 편지만은 늘 되찾고 싶을 만큼 간절하다.

펜글씨체로 글씨마저 어른스럽던 너의 편지가 늙은 말들로 가득했던 마른 위로들이 그립다.

네가 이야기하는 인생은 여전히 별 수 없어서 별 수없이 하는 것들로 채워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냉소적이고 서늘했지만 그래서 더 위로가 되었던 너의 이야기들이 사는 내내 생각이 난다.

지금도 한 번씩 너의 이름을 녹색창에 검색해 보곤 한다. 어쩌면 작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혹여 다른 필명으로 활동하지는 않을까 싶어 너처럼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책을 읽을 때면 작가의 이력도 꼼곰하게 기웃거린다.

너일지도 모른다와 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문체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서 다행이다.

언젠가는 글자 위에서 너를 또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번도 우리는 친구인 적이 없었지만 사실은 그시절 나를 구원해준것은 너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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