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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21. 2023

범인은 알지만 침묵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일 년은 거기에 잘 있다.

다이어리를 도난당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무렵. 한 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학교 안 교실,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어쩌면 저 시간이 원인을 제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쉽게 따분해했으니깐)

그 시절 다이어리는 분신과 같았다. 하나라도 잊혀질세라 모든 것을 기록하던 시절.

얼마나 세세하게 적었냐 하면 언제 누구와 통화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매점에서 무얼 사 먹었는지, 야자를 빼먹고 무얼 했는지, 라디에오에 특별게스트가 누가 나왔는지 등등 나를 모르는 사람조차 나에 대해 알아챌 수 있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새해 초 빳빳하던 다이어리가 겨울즈음 너덜너덜해진 촉감으로 만져질 때 한 해를 부지런히 산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잘도 여물어 가고 있던 다이어리가 사라졌다.

내 인생 두 번째 도난사고.(첫 번째는 마이마이를 엄마한테 선물 받고 다음날 도서관에서 바로 도난당했다)

기억을 더듬고 하나씩 되짚어갔다.

가방 속 머리카락 하나까지 모두 끄집어냈다.

사물함은 새로 정리했다.

서랍을 비워냈다.

완벽하게 사라졌다.

인기 많은 아이도 아니고, 이렇다 하게 특별할 것도 없는 나였다.

아, 내가 무얼 잘못했나?!! 누가 나를 미워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모르겠다.

평소 잘 울지 않던 나였지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시시한 여자아이처럼 책상에 엎드려 가장 억울한 아이처럼 울어댔다.

친구들은 위로했고, 함께 여기저기 찾아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은 증발해 버렸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친구 집에 모이기로 했다.

친구들과 모이는 가장 큰 목적은 단순히 모이는 데 있지 모이고 나서 무얼 하느냐는 정하지도 않거니와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이면 되었다. 서로 다른 걸 하고 있어도 아무 상관없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우연히 친구 방에 나 혼자 벌러덩 누워있게 되었다.

그러다 앉았고, 책상 옆에 놓인 친구 가방 안으로 살짝 삐져나와있던 그것이 눈에 띄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낡음의 정도, 나의 손에서 자라난 마모됨의 순도.

나는 평생 도둑질은 못하리란 걸 그날 알았다.

심장이 이렇게 세게 날뛰어서야 지나가는 개미조차 날 쳐다볼 것 같았다.

가방 속으로 손을 뻗었다.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쥐어 보는 순간 알았다.

틀림없이 나의 다이어리였다.

그러고 나서 정확하게 마주한 나의 잃어버린 일 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빠르게 친구의 가방 속 원래의 자리에 다시 넣었다.

짧은 순간 그렇게 나의 1년을 우악스럽게 삼켜 버렸다.

내가 촌스럽게 책상에 엎드려 울 때 가장 많이 위로해 주던 친구였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 친구조차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따금씩 그때, 나의 결정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 그려보곤 한다.

후회해서가 아니라 달라졌을까 싶은 의구심에서다.

어디서 달라졌을까.

어디가 달라야 했을까.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

사소한데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큰 일인데 담담하게 넘어가기도 한다.

마음들이 여러 개라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끔 용서를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되는 마음도 있다.

잘 늙어서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살면서 자주 마주했음 하는 마음..

가장 반가운 마음이 이런 할머니 같은 마음이다.


여전히 의문이다.

그때 나는 이르게 늙었던 걸까,

그저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함이었던 걸까,


여전히 그녀와는 친구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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