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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21. 2023

매일 실패하세요

밤손님

부디 고요한 밤을 지킬 수 있기를 소원했다.

나의 평온한 근무가 다른 이의 안온한 밤과 연결 지어지는 시간.

별일 없는 나이트 근무를 원하는 것은 이타적인 바람이기도 했다.

밤마다 응급실을 통해 올라오는 훼방꾼이 생겨나기 전까지 매일 꿈꾸던 착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밤손님이다.

오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알약을 먹었다고 취한 듯 짓이겨진 발음으로 말했다.

밤손님은 한국말을 외국어처럼 했다.

위세척을 하고 올라오는 날은 오히려 힘들지 않았다.

그 개수의 차이를 알 수 없었지만 조금 모자라게 먹고 온 날이면 정말 기운 빠지게 했다.

밤새도록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와서 나를 괴롭혔다.

잠이 오지 않아요.

언니, 약 좀 줘요.

언니라고 부르는 날은 그래도 얌전한 날이다.

거친 언어도 곧잘 쏟아 냈다. 남자보다 여자의 욕이 더 감정적이고 찰지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뱉은 침에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찝찝하고 불쾌했다.

뭐든 시간이 쌓이면 정이 든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그녀가 왜 자꾸 그렇게 자신을 소비하는지 궁금해질 즈음 그녀도 내가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밤에 출근하니 기다렸다며 이따 선생님 한가할 때 커피 갖고 갈게요 한다.

무심하게 미소만 흘렸다.

궁금은 하지만 나의 시간을 헤집어 놓는 것은 싫었다.

새벽 2시 무렵, 그녀는 친절한 가면을 쓰고 나왔다.

앉지도 않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서서 그녀가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선은 지키고 내쪽으로 너무 뭉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뻔한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그러다 그녀가 대뜸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죽고 싶은 지 오래됐어요.

....

손목을 보여주었다.

작은 손목에 그렇게 겹겹이 쌓인 퇴적층을 처음 보았다.

사람 몸에도 그런 게 쌓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행동했다.

-대체 왜요

-모르겠어요. 죽고만 싶어요. 이제 왜 죽고 싶은지도 몰라.

그냥 자고 싶은 것하고 같아..

그게 진짜였다. 그녀의 진짜 이야기.

처음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테지.

오래되다 보니 이제 본질은 사라지고 습관처럼 남겨져 버린 행위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럼 이제 살아봐요라고 해야 맞았다.

하지만 침묵했다.

나의 말이 그저 허공에서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커피를 마셨던 것 보면.

누군가에게 좀 살아봐요 라는 말이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자꾸 시도해서인지 이제 가족들조차 그녀를 방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후에도 우리는 내가 그 병원을 그만두기 전까지 꾸준히 밤마다 만났다.

더 이상의 티타임은 없었지만 눈은 마주쳤다.

알지만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녀는 생각보다 센스 있게 알아챘다.

낭비하는 그녀의 시간을 안쓰러워할 마음이 나는 추호도 없었다.

나에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가끔 그녀가 떠오르고 궁금해진다.

죽고 싶다고 울다가도 또 경박스럽게 웃고 떠들던 그녀가,

밤마다 도망 나가 환자 복을 입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오던 그녀가,

무엇보다 나에게 수면제를 건네받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미소를 짓던 그녀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텅 빈 눈동자로

부조화스럽게 무너지던 그녀가 종종 생각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비척거리며 서있던 그녀.

여전히 실패하는 선택을 하며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실패를 바란 적은 없지만 부디 그녀만은 번번이 실패하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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