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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21. 2023

영영 안될 것 같아요.

그림책 테러피

마침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림책테러피?

그게 어떤 것일지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테러피라는 단어는 어쩌자고 지워 버렸을까.

그때 나에게 그림책 테러피는 그저 잘 걸어갔다가 잠시 앉아 환기하고 다시 걸어오면 되는 일로 여겨졌다.

그림책테러피가 아닌 걷기의 시간으로 이미 재해석되어 있었다.


첫 수업시간 삥 둘러앉아있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맨 뒤에 앉아야 지란 야무진 계획을 짜고 갔는데 이렇게 앉아도 저렇게 앉아도 선생님과 너무 가깝다.

앉기가 무섭게 A4용지 한 장을 건네시더니 명패를 만들어 앞에 세워 놓으라 하신다.

명패라..

아 이거 우리 아이 1학년 공개수업 때 봤었는데 순간 잘못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두 시간 수업 중에 한 시간을 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이렇게까지 작위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살면서 나를 소개하는 일에 이만큼 애써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만난 지 겨우 십분 남짓된 사이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정말 곤욕스럽다.

불편한 마음이 커지니 방금 전에 먹고 나온 빵이 목울대에 끼어서 내려가질 앉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는 듯 애먼 엄지와 약지사이 골짜기만 사정없이 찔러댔다.

본수업이 시작되었다.

하필 이런 때 저 그림책의 내용은 얄밉게 좋기만 하다.

그림책에 나오는 상황들에 자기 자신을 접목시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고 하신다.

모든 상황들의 주체는 나였고, 개인사는 드러낼 수밖에 없는 아주 사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얽히고설켜 있는 주변인들까지 원치 않게 오픈시켜야 하는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대단히 강압적인 질문들에 반해 너무 나른한 목소리라 더 혼란스러웠다.

무작위로 호명해서 묻고 또 물었다.

달큼한 목소리로 인정사정없는 폭격이었다.

결국 각자 쓴 것들을 모두 공개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여러 해 비비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들.

누구에게도 꺼내기 쉽지 않은 마음이라 꺼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평소 저 밑에 던져둔 눅진하고 쾌쾌한 멍석들이 들춰져 나뒹굴고 있었다.

호명될 때마다 번번이 나는 아직 다 적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적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 입으로 전할 마음이 애당초 없었으니 영원히 적지 못한 상태인 것이 진실이었다.

지극히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던 남의 개인사를 듣는 일은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쾌했다.

사연사연마다 공감하고 위로해야 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상황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모두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의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애매한 시간이 흘러갔다.

집에 걸어오는 길은 유난히 지난했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게 많은 나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뾰족한 날을 세우고 걸어 잠근 문을 다시 한번 단단히 여민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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