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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21. 2023

구김살 없는 아이

아무렇지 않다.

8살부터 꾸준히 불안했고, 9살 10살 내내 억울했고, 11살 이후부터는 늘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는 마음으로 자랐다.

착한 아이처럼 사는 것이 우리 가족을 지키고, 엄마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정작 나는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종종 그때의 나를 안아주곤 한다.


학년초면 으레 하는 가정환경조사.

눈을 감고 손을 들라고 했다.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빠 없는 사람?

-엄마 없는 사람?

그만큼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짜 비밀로 해야 할 만큼 부끄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부당하고 비참한 기분을 일찍이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은 어려서부터 친숙했다.

환경조사라는 미명아래 학교폭력이 반복되었다.

매학년 신학기가 가장 크게 얻어터지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늘 비밀처럼 가장 친한 친구한테만 말하는 행동을 언제까지 했는지

따져보니 무려 고등학생까지다.

그만큼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날 뿐이다.

 

내 동생은 나와 나이차가 꽤 난다.

6살, 헌데 열 살 이상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그 아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자랐다.

그건 동생이 결혼하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는데 그전까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동생은 걷고 뛰기 시작하고부터 못돼 먹은 아이처럼 매일같이 나를 괴롭혔다.

사실 그 아이가 괴롭힌 건 아니다.

챙겨야 하고, 같이 놀아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준건 엄마였거나 어쩌면 그도 아닌 나 스스로였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아이에겐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 때문이라고 탓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마다 내 첫 질문은 항상 같았다

-너 동생 있어? 언니 있어?

진짜 부러워서 외동 하고는 놀지도 않았다.

구김살 없이 자란 아이가 주는 횡포는 너무 투명해서 나 같은 애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번번이 작아지고 하찮아지는 기분으로 힘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동생이 있거나 혹은 언니 오빠가 있는 친구와만 놀았다.

그래야 내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깐. 그래야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 테니깐.

동생을 피해 친구 집을 전전했다. 책이 많은 친구 집에 가서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었다.

책 보다 노는 게 더 좋았지만 책 속에 숨을 때에 가장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어두워만 지면 동생을 찾아 나섰다.

동생 없이 귀가해서는 안되었다.

내가 왜 나보다 그 아이를 먼저 챙겨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상이었다.

일요일에는 교회를 빠지지 않고 갔다.

신앙이 깊어서가 아니라 동생 없이 친구랑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 열심히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교회에도 동생을 데려가야 했다.

대체 왜...

별수 없이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동생도 잘 챙긴다며, 어쩜 이렇게 착하냐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칭찬에 기분이 좋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칭찬은 동생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고 주문을 거는 것처럼 들려 몹시 거북해졌다.

이러다 내가 동생 없이 다니면 안 되는 아이처럼 기억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때 나는 21살이 아니라 겨우 11살이었다.

그리고 내 동생은 통제불능 5살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다녔는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게 낫겠다는 결정이었다.

교회와는 그렇게 멀어졌다.



요즘은 아빠의 부재에 대해서 은밀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못살게만 굴던 동생은 어느새 단단해져서 오히려 내가 기대어 지내기도 한다.

세상살이라는 게 영영 그럴 것 같지만 하나도 그런 것이 없단 생각이 든다.

구겨졌다가도 다시 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구겨지기도 할 것이다.

질곡의 시간이 더디더라도 상관없이 조금은 밝아져서 지나가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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