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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Jan 14. 2023

PTSD

극복가능하겠어?

어제도, 오늘도 비가 왔다. 난 비를 좋아했다. 그날, 그 사건을 겪기 전까지 말이다.


월드컵으로 우리나라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일이다. 외식업체에 다니고 있던 나는 퇴근이 늘 늦었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막차를 타고 집에 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너무 천천히 걷다 보니 같이 내린 사람들을 놓치게 됐다. 그래도 터덜터덜, 음악 들으며 아파트 후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 어떤 남자를 보게 됐다. 그 남자가 나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가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대로 멈춰서 이어폰을 뺐고 가방을 크로스로 고쳐 맸다.


그때 집에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그대로 걸어갔다.


코너를 도는 순간, 나를 보고 돌아섰던 그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재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아파트 후문 앞에서 그대로 잡혔다. 내 목을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키가 너무 컸고,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가방을 던져주려 했지만, 가방을 뺏으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너무 무서웠고,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 미친 듯이 저항했다. 마침 들고 있던 우산이 골프용이라서 크고, 단단했다. 나도 힘이 좋은 편이라 우산으로 마구 저항했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했다. 겨우 목을 풀고 정신 차리고 얼굴을 보려 했는데 뭔가 번쩍 하는 것이 보였다.


'칼'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정신이 나갔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를 했다. 무슨 정신으로 뛰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서 내 꼴을 보니 거세게 저항한 탓에 귀걸이가 빠졌고, 우산이 망가졌다. 그리고 내 옷과 손은 피범벅이었다. 가족들 모두 놀랐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바로 가로등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꺼져 있었다. 이것도 한몫했다고 느낀 엄마는 "당장 구청에 가서 민원을 넣겠다"라고 말하면서 나를 살폈다. 딸이 무서운 일을 당하고 왔으니 어느 부모가 가만있으랴...


'그래도 다행이지. 혹시 동생이나 엄마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힘이 세니까 이 정도로 끝났지.'라는 생각을 하니 안심이 됐다. 다음 날 난, 너무 아팠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출근을 못 했다. 이 사건이 직장에 알려지면서 본사에서 여직원들은 일찍 귀가시킬 것을 권장하는 지침이 내려왔다고 다. 그러나 난, 결국 퇴직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비가 오면 아직도 그때 일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많이 퇴색된 것은 맞지만, 비만 보면 여전히 불안하다.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길래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일은 떠올리기도 싫었고, 글로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미루다 미루다 차분하게 그 일을 떠올리며 써 내려가는 지금, 불안도가 조금 낮아진 것도 같다.


' 쓴 것 같기도...'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되지만, 이런 일은 아무도 겪지 않길 바란다.

이제 나의 기억도 더 희석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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