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집시다!
“네, 상담센터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흐릿한 흐느낌만 들릴 뿐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계속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불길함을 직감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힘들죠?” 수화기 너머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하면 뭐든 도와주시나요?" 불안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전문가 선생님들이 많이 계세요. 이야기 나눠보고 함께 풀어가요" 다시 시작된 침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임신했어요. “ 예상했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들으면 놀라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임신한 사실은 언제 알게 됐는지, 남자 친구는 알고 있는지, 부모님에게 언제 말할 건지 등 우리는 대화를 천천히 이어갔다.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아이는 무섭고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 훨씬 잘했다고 독려하며 진정되길 기다렸다. 몇 살인지 물었더니, 18살이라고 답했다. ”저 병원 가야겠죠? 너무 무서워요. 저는 이렇게 무서운데, 남자친구가 연락이 안 돼요 “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아이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모든 책임을 여자 아이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부모님과 의논은 필수였다. 극구 반대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어렵게 부모님에게 이야기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상담선생님들에게 사례를 넘겼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속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가 있다. 예민하고 피하고 싶은 이야기, 바로 성(性)이다. 어른도 힘든 것이 성(性)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꽤나 자극적이고 궁금한 주제다. 발달단계에 맞는 아주 자연스러운 호기심이다. 현재 학교에서 성(性)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청소년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의 답변이 가관이다. “강사 선생님들 하는 얘기는 우리도 다 아는 얘기라 재미가 없어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는데 물어봐도 노코멘트하던데요? 우리가 성관계를 할까 봐 걱정되나 봐요.” 아이들은 히죽히죽 웃었다. 혹시 친구들 중에 성관계를 경험한 아이들이 많은지 물었는데, 이성끼리 여행 가서 성관계 했는데 피임하지 않아서 불안에 떠는 친구도 많고, 특히 성폭행을 당한 친구들도 제법 있다는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물론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침묵한다고 덧붙였다. 예상했지만 상상이상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 성(性) 교육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문득 어느 성교육 강사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학교에 성교육 가기 전, 교육내용 수위 조절을 해 달라는 지침을 학교 관계자에게 받아요.” 아이들이 성(性) 교육을 받는 걸 예민하게 생각하는 학부모들은 학교에 민원을 제기한다. 어차피 크면 알게 될 텐데 벌써부터 자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냐? 는 내용이다. 학부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학교입장에서 내릴 수 있는 조치는 강사에게 교육내용을 조절해 달라는 지침을 주는 것뿐.
안타깝게도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는지 잘 모른다. 온라인에서 만난 모르는 남성들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사진 찍어서 보내는 초등학생들이 있다. 상대 남성을 경찰에 신고해도, 아이는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난다. 온라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성과 연애를 시작하는 청소년도 있다. 상대방 얼굴을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 전화번호도 모른 채 두 사람은 온라인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그 끝은 결국 헤어짐이지만, 그냥 헤어진 것에 감사할 뿐이다. 월경을 기록하는 애플리케이션이 다양하게 있는데, 그중 몇 개 애플리케이션 익명 게시판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많은 여성들이 나이 상관없이 다양한 질문을 남긴다.
남자친구와 성관계 한지 3일이 지났는데, 임신이 됐을까요?
성관계 했는데 아이가 생길 것 같아요. 산부인과 가서 주사 맞으면 괜찮을까요?
분명 질외 사정을 했는데 임신 안 되겠죠?
아이가 생겼는데, 남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해요. 저 어떻게 하죠?
남자친구가 여행 가자고 하는데, 이건 잠자리를 갖자는 말이겠죠?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뭐라고 하죠?
게시 글을 읽고 자신의 경험담을 댓글로 달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정보를 나눈다. 수면 아래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숨기기 급급하다.
과연 성(性)을 숨긴다고 숨겨질까? 이를 반증하는 실험을 EBS에서 진행한 적이 있다. 성(性) 교육을 자세하고 꾸준하게 받은 청소년이 성인이 된 후, 성(性)에 대한 인식변화가 있었는지 추적조사를 했다. 일반적으로 성(性) 교육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관계만 생각한다. 그런데 EBS 실험은 달랐다. 가장 먼저, 자신을 먼저 알아가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 그리고 성(性)을 바라보는 생각차이, 서로가 꿈꾸는 성관계 하면 좋을 장소, 성관계 전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등 굉장히 자세하고 꼼꼼하게 교육했다. 아이들은 흥미로운 마음으로 교육에 임했지만, 부모님은 벌써부터 알려주면 어떻게 하냐고 몹시 불안해하며 인터뷰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인이 된 후 아이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했다. 이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스킨십을 할 때 더욱더 조심하게 되고, 내 감정을 넘어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는 눈이 생겼다고 했다. 여성들은 상대방이 내가 원하지 않는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요구할 때 싫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남성들은 야한 동영상과 실제가 다르단 걸 알고 확실히 알게 됐다고 했다. 아이들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됐고, 성(性)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다 명확해지면서 이성을 존중하게 됐다. 더불어 성(性)은 숨기지 말고, 호기심에 대해 인정하고 정확한 정보 전달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실험의 결과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할지 명백하게 보여줬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태풍과 홍수 피해를 입는다. 그때마다 전문가들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예방을 통해 사고를 막아보자고 말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피해복구를 해결하지 못하고 매년 재해를 입는다. 자연재해 보다 성(性) 교육을 훨씬 잘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간단하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이성에 대한 궁금증, 어른들도 분명 궁금했을 것이다. 부모님 몰래 비디오 빌려보고, 잡지 보며 성장했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아이들이 궁금할 만한 것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알려준다면 쉽게 풀릴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性) 교육은 성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性)을 바라보는 관점차이,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은 분명, 베이비박스를 없앨 수 있고,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하는 청소년이 없어질 거라 희망한다. 그 시작은 ‘우리 애는 절대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부터 잠시 접어두는 것부터다. TV에서 키스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면서 숨기지 말자.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알고, 숨기면 숨길수록 더 알고 싶어 한다는 점, 잊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