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 스트라이프 셔츠

by 래연




그가 내게 처음 온 것은......

은행. 만추. 안개 가득한 11월 말. 신촌 아트레온의 고층이었다. 내가 청바지를 입고 간 파티였다. 아사모, 아르헨틴 탱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처음 가 본 동호회의 파티였다. 주말의 짧은 서울 체류에서 단지 낯선 공기나 좀 흡입할 수 있겠거니 하며 갔었다.


파티에는 파티복을 입어야 한다는 법칙 따위는 없다. 물론 초대 메일에 드레스 코드는 공지되지만. 그것은 그저 스타일 있는 파티 컨셉을 내세우려는 애교일 뿐. 드레스 코드가 무슨 색이건 대개는 다들 그즈음의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기는 옷을 걸치고 간다.


나는 누구나 흔히들 입는 섹시 러블리 드레스 원피스는 관심 없었다. 그렇게 입으면 판에 박은 듯, 여자들은 다 그만그만 비슷해 보여 싫었다. 그렇게 입고서 땅게로의 간택을 기다리는 다소곳함이란, 언젠가 보았던 집창촌 쇼윈도 너머의 청초한 그녀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가부장적인 춤인데 옷마저 고분고분할 수가! 자기를 나타내려는 무도회이거늘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기를 같은 방식으로 포장하다니 아이러니하다.


나로 말하면 스트라이프 무늬 슬랙스가 좋다. 예전에 밴쿠버에서 온 셀마가 연하게 반짝이는 줄들이 새겨진 바지를 꺼냈을 때 나는 ‘바로 저거.’라고 여겼다. 둘둘 말아 가방에 쏙 넣었다가 어디서건 얼른 꺼내 주름을 다릴 필요도 없이 갈아입으면 되는 그것. 진짜 자유스런 탱고복. 게다가 셀마는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스트라이프 무늬는 여자를 섹시하게 보이게 해.”


길고 시원시원한 세로줄 무늬의 바지를 준비하지 않았지만 청바지도 나쁘지 않다. 장내엔 청바지 차림이라곤 나밖에 없기는 하지만. 더구나 얼굴엔 한 점 화장기라곤 없이, 나는 청바지 위에 보랏빛 니트를 입고 있다. 20분 후의 그가 다가오게 만들, 그의 심장을 감싸줄 보라 니트 스웨터.


페스티벌 한 구석에 앉아 펼쳐지는 공연들을 차례로 보았다. 공연들은 다른 동호회 협찬까지 이어져 많고도 길었다. 이때만 해도 짐작하지 못했다. 곧 누군가 뚜벅뚜벅 다가오리라는 것을. 게다가 이 생면부지의 거인은 이런 말을 건넬 것이다. “같이 추시겠어요?”


그는 스트라이프 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안도한다. 이 공간에 생뚱맞게 처박혀 있다 가야 한다는 실망이 해빙되었다. 파티의 엘오디 라인 속으로 급류처럼 빨려 든다. 드라큘라 백작의 관에 못 박는 망치소리처럼 반도네온이 쿵쿵 진하게 울려대는 네 박자 탱고 곡, 딱딱 떨어지는 박자 속에 애잔한 부드러움이 경쾌한 듯 흘러가는 호텔 빅토리아, 이후 몇 곡이 흘렀던가. 마지막 곡은 생면부지의 파트너와의 어색함을 지워주기에 걸맞은, 흔들리는 요람 같은 발스 데스데 엘 알마.


부지불식간, 약간의 승리감에 가볍게 도취되었다. 비주얼로 현혹하지 않는 블루진의 여자로서 춤 신청을 받은 것은, 그가 자선을 베푼 게 아니라면 어쩐지 기대되는 일이다. 그가 여자에게서 찾는 것은 뻔한 관능이 아닌 다른 무엇이지 않을까? 그는 조금은 진기한 영혼을 가진 남자가 아닐는지.


상념에 도취되느라 그의 춤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최소한 그의 춤 매무새가 반듯했다는 것 말고는 정작 그의 춤에서 기억할만한 걸 찾지 못했다. 발이 엉키면 그는 무조건 사과하곤 했다.

나는 아트레온에서의 감흥을 떨치지 못한 채, 주말마다 늘 가던, 소금 무더기를 무덤처럼 몸 위에 삽으로 쌓아 올리고 찜질을 하는 여성전용 찜질방 ‘솔트 나인’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밖에는 눈이 내린다. 그의 안부 한 마디는 내 방에 불쑥 튀어 들어온 눈발로 꽂힌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골목이 지워지고 있다. 망각의 나라에서 살아 돌아온 활자, 안녕하세요...... 메신저 창에 뜬 그. 어제 그의 과묵한 행색으로 보아 메신저라니 뜻밖이다. 학구적인 뿔테 너머로 억제된 슬픔의 무덤 같은 표정의 그였거늘.


“어제 좋았어요.”

“아, 네...... 저도요.”

마땅히 답할 말이 없다.

“마치 어린 시절 같이 놀던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요, 뭔지 모르게 포근했어요.”


포근하다, 자주 듣는 말인 데다, 때론 말로 꺼내지 않아도 나를 마주한 남자들의 눈빛에서 종종 읽어내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어 나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뭐하세요?”

“공무원을 위한 창의력 특강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공무원에게 창의력이 딱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답할 말을 모르겠다. 이럴 바에는 지금 무슨 음악을 듣고 있냐고 물을 걸 그랬나?

“라라라 라라라라......”

“......?”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거든요. 기분이 좋아서요.”



그로부터 머지않아 그는 디아나의 동호회 게시판에 공지 하나를 올렸다. 그가 개최하고 참여한 전시회 안내였다. 전시회장에서 춤출 수 있게 탱고 음악을 틀어놓는다고 했다. 다들 몰려갈 것이었다.

그림이라고? 그럼 그는 미술가였나? 전형적인 교수나 연구원처럼 보이던 외모가 감춘 반전이다. 스마트한 외모의 예술가도 있을 수 있지 뭐,라고 흘렸다.




“어서 와요.”

자기 작품이 보란 듯이 걸리는 자리에서마저 그는 예의, 그 수줍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자주 망설이므로 내가 알아서 그의 행간과 지문을 읽어내야 한다. 팬텀, 언제고 반쪽 가면 뒤로 사라질 준비를 하는 반인 반혼. 불가피하게 자기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영 탐탁잖다는 기색으로, 그는 존재와 어둠 사이에 끼어,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 웃어 보인다. 하필이면 내게는 이런 그가 유독 잘 보이는 것인가.


플로어가 매끈한 미술관, 귀에 익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포르 우나 카베사 Por Una Cabeza'. 아직도 그는 멀뚱히 서 있고 그의 뒤로는 어느새, 훤칠하고 유쾌한 남자가 누군가를 붙들고, 어떤 시선에도 위축되지 않을, 구김이라곤 없는 표정으로, 시원시원한 걸음새를 디뎌 마룻바닥을 미끄러져 간다. 곧 그의 기다란 팔은 유연한 방향키처럼 갤러리의 공간을 휘젓는다. 밝으나 경박하지 않은 미소를 담은 익살스럽고도 초연한 표정으로 반인 반혼이 흘린 어둠의 기척들을 소제라도 하듯 훑고 있다.


“자, 추세요.”

긴 팔 남자를 선두로, 어느덧 춤추는 커플은 서넛 더 불어났다. 그들을 가리키며 그가 멋쩍게 무도회를 권한다.

그는 알기나 할까? 내가 기다리는 초대는 “추세요.”가 아님을. 당장에 그가 어둠의 망토를 펼쳐 휘두르며 그 안으로 나를 불러들였더라면, 나는 기꺼이 아무 저항 없이 암흑의 나라로 가는 수레를 따라 올라탔을지도 모른다. 나와 추고 싶어 할 터인데도 그는 나를 망토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뭐가 있나, 한 발 한 발 다가서게 만드는 얼마나 불성실한 유혹이런가! 세상의 절제로운 매너들은 얼마나 불친절한가!


결국 그와도, 다른 누구와도 나는 춤추지 않는다. 허공 속으로 ‘여인의 향기’의 마지막 음이 휘발된다. 어느새 그는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 자신이 가르친 일반인들의 예술적 결과물들이다.

그는 자기 작품을 딱 하나 전시했다. 그 앞에 서니, 소위 개념미술이란 것의 개념을 배우는 것만 같다. 4절쯤 되는 캔버스는 텅 비었는데 화면 전체가 선크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가끔 주기적으로 바깥에 놓아 일광욕을 시킨 다음 다시 건다고 한다. 여전히 어디서고 그는 맨 피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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