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걸으면 자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실외기 물방울을 순간, 비로 착각하곤 했다. 여기 리우에 내가 오기 직전엔 비가 꽤 쏟아졌다고 하지만 아마 난 한 방울도 못 보고 떠날 거 같다.
여기 비는 리듬도 다를 텐데, 비를 들으러 다시 오고 싶다.
내가 숙소를 옮겨 이사 갈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토니오의 고양이들은 그저께부터 뜸하다. 방에 오지 않는다. 이 집의, 커다란 바나나 잎들이 바람에 스쳐 빚어내는 소리와 고양이들 그리고 고양이들을 부르는 안토니오의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 흘러 죽기 직전에 이르러 아득하고 가깝게 들려올 것 같다.
느긋이 미루다 기습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안토니오 덕에, 지극히 소소한 일상들이 낱낱이 사건처럼 되었었다. 어머, 안토니오가 그 오래 담가 두었던 운동화를 빨아 널 다니, 저 세탁기 안의 빨래들은 대체 언제 널려나..... 집에선 주로 해먹에 나른하게 누워있거나 하며, 조용히 누운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안토니오가 엊저녁엔 광장 옆 바에서 어떤 동호회에 참석하여 술잔을 들고 담소하는 모습에선 이전에 본 적 없는 활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위층에 그의 어머니가 와있다.
이 집의 다정한 모든 것들처럼, 살다가 어쩌다 가깝게 다가온 것들은 그냥 떠나가게 두고, 다시는 뒤돌거나 붙잡지 않으며 이런 이별의 되뇜조차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 여러 이유에서.
이별이 반복 학습되면, 옆에 온 걸 알아채는 순간, 잘 가 소리를 진달래 카펫으로 깐다. 생애 초반에 가뜩 모질어져 버린 나는 이런 소리 지껄이는 게 낙이다.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딱히 그래 본 적 없는 내가 할 소리라곤, 행복이란 단어를 뇌리에서 지우고 포기를, 포기 포기 줄 맞춰 간격 띄워 심으세요. 아니면 진짜로 행복한 사람을 리서치하며 인터뷰하라 하고 싶다. 예제로 삼으라는 건지 부러움 키우라는 건지 모를 잡지나 드라마 혹은 옆 옆 친구 거 베껴 적지 말고.
아직은 내가 행복해지거나 혹은 그런 개념을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행복은 딱히 일인용 침낭이 아니라 온 세상이 연결된 거여서, 어쩌면 개인의 권리가 아닌 것도 같아요. 행복추구권이란 말은 있지만요. 내가 잠시 잠깐 행복한 기분이 된들, 누군가는 내게 그럴 자격 없다며 열라 질투하거나 끌어내리려 할 텐데요.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싶으면 찝찝해서 어째 못 행복할 거 같아요. 더욱 모질어진 버전의 세상은 어지간한 불행 조차에도 면죄부(혹은 면제부) 하나 주지 않잖아요. 누가 뭐 래든 아랑곳 안 하고 행복하기에는 난 피부가 얇아요.
잠들면 사정이 달라지는데, 그것도 잠이 좀 와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