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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Oct 08. 2020

모든 다정

- 리우의 밤하늘엔 숨는 별이 없다




                        


우리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새로운 집주인 미셀은 와이파이서부터 집의 갖은 설비의 모든 세부와 애플 TV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사용법을 설명해나갔다. 

그와 이야기를 자주 나누면 여기 말이 꽤 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어떤 뚜껑을 살살 돌리듯 말하며 조용한 속정 투성이인 안토니오의 말투와는 달리, 문법까지 완벽할 거 같은 또렷한 발음을 구사하는 미셀의 출신은 독일. 실은 독일인이었다. 


그의 설명에 약간은 건성으로 귀 기울이며, 한편으론 어서 씻고 커피나 한잔하였으면 하는 속내에선, 우리나라의 근대화, 이어 도회화되면서 잃어간 정다움 같은 걸 떠올렸고 이와 더불어, 범국민을 노동으로 밀어 넣는, 당시엔 듣자마자 가난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만 같은 신성한 힘이라도 솟아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를 노래의 '새벽종'조차 울려 퍼질 참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안토니오의 시골을 떠나 언덕 하나를 넘어서는, 시골스런 옛 자취는 사라져 한결 편리한 또 하나의 공간으로 왔던 것이다.  여기도 붙임성 좋은 고양이가 한 마리 있지만 집에 들여놓고 키우지는 않는다. 







길게 이어진 설명 뒤 그는 조로에 물을 가득 채워서는, 구멍이 나서 난감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한 손으로 물 새는 곳을 막아서 욕실에서 날라다 베란다로 가더니, 그 뚫린 조로로 화분들에게 물 주는 시범을 보였다. 그 방법은 가히,  베란다에 거주하는  크고 작은 크기의 화분들에게 대강 랜덤으로 터프하게 물 주기라 칭할만했다.

어쨌든 거실 주방 화장실이 딸린 층 하나를 통째로 쓰는 우리가 누리게 될 베란다에서 하루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식물들에게 말 걸기. 특히 키가 가장 큰 녀석은 물을 거르게 되면 곧장 시들해진다며 주인은 몸이 쇠약해지는 흉내까지 내보였다.




이렇게 대체로 첨단인 공간에서 에어컨까지를 누리며 쾌적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편리에는 마법은 조금 결여되는 법인지, 샐러드에 필요한 올리브유와 식초가 없다. 안토니오 네 주방은 도무지 정리도 청소도 되어있지 않은 와중에서도  정작 필요한 건 신기하게 다 발견되곤 했었다. 호박죽 해 먹어야지 하자마자 갑자기 누가 꺼내놓았는지 으깨는 망치가 나타나는가 하면, 채소를 버무려야겠어하는 날은 내 마음을 누가 듣기라도 한 것처럼 채소 물 빼는 체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요긴했던 올리브 유와 후추 및 발사믹 식초는, 바로 당신에게 사용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랍니다라고 말하듯, 간소한 듯 멋진 요리를 매번 도왔었다.








안토니오의 집과 거기 내가 머물던 방이 보이는 전경







                                   

그래도 새 숙소엔 작년 한국인들이 남기고 간 나무젓가락을 비롯한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곧 상파울루행 비행기 편에 새로 도착할 친구가 가져올 너구리 면을 이 첨단의 주방에서 끓여 나무젓가락으로 건져 먹게 될 거다. 베란다에서, 석양을 감춘 구름을 뚫고 날아오는 한 무리의 새를 보면서.



짐을 옮겨 내려놓자마자 곧장, 알프스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온 하이디의 향수에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숙소에 처음부터 묵었더라면 여기 또한 충분히 다정한 숙소로만 만나 졌을 텐데, 이전 안토니오의 집이 워낙, 소위 옛집의 다정이라 불릴 만한 요소들을 한껏 품고 있었기에, 이리로 오자마자 탯줄 잘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백 년 넘은 안토니오의 집은 벽이 두껍고 천장이 높아서 오로지 따스함과 서늘함만을 걸러 품어주었었다.



이리로 오는 동안 이사 거리는 짧았지만 울퉁불퉁한 돌길에 바퀴가 다치지 않게끔 언덕 위를 느리게 끌어야 했고 이후 이어지는 최후의 계단들이란....... 정오 가까워가는 36도 리우 언덕의 골고다 체험이었다.


여기는 삼바의 성지라 불리는 산타 테레자 언덕의 집, 안토니오 네랑 여전히 같은 동네다. 여기 베란다에서는 저 아래 커다란 바나나 나무가 있는 옛집이 보인다. 












해변을 좋아한다면 코파카바나에 숙소를 잡을 일이고, 음악에 탐닉하고 싶다면 라파 혹은 산타 테레자. 해변 일대는 부유하고 시크한 동네여서 행색도 말끔한 아저씨들이 오후에 카페에서 와인을 기울이는 풍경. 부유하고 깨끗한 대신 다른 대도시에도 흔히 느껴질 법한 어떤 건조함에 맘이 끌리지는 않는다. 


반면 산타 테레자는 언덕 지형에다가,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끼리끼리 모여 연주하고 노래하는 밤 풍경, 한밤중에 들려오던, 심연을 곧장 파고들어 모든 번잡함을 치유 평정하여 인간들의 뿌리를 지축으로 모아 줄법한 종교의식 '마쿰바'의 깊고 강한 북소리와 노래, 게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새소리, 거의 24시간인 것 같은 과일 가게 아가씨의, 볕이 입 맞춰 키운듯한 뺨에 흐르는 미소, 어디나 흘러 다니는 경계심 없는 고양이들과, 화음과 박자까지 맞춘 개들의 합창, 아티스틱하기 짝이 없는 벽화들, 클럽과 바들. 이렇게, 해변과 산타 테레자는 강남과 홍대쯤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리우에서 만난 브라질 사람. 이제는 하이디의 알름 할아버지처럼 되어버린 안토니오에게 이윽고 어젯밤에, 오늘 떠나는 시간을 통보했었다. 아침 9시 40분쯤 갈 건데요. 그랬더니, 뭐 그리 새벽같이 가려고 해,라고 그는 답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 집에서의 마지막 커피를 따르러 위층에 올라갔을 때, 주방 옆 거실엔 웬 나체의 여인이 앉아 있다가는 그리 놀라지도 서둘지도 않는 기색으로 방에 들어갔다. 그 풍경이 비현실적 이리만치 자연스러워 마치 그녀가 몸을 가리는 '피부'라는 옷을 입고 있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그 집의 모든 다정은 내가 떠나는 마당에도 끈적임이라곤 없이 여전히 바나나 나무의 넓은 잎을 시원하게 스치고 있었다. 그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환영인사이자 자장가, 감추었다 들려주는 동화이자 전송의 노래였고,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내 기억 속에 변함없는 재회의 율동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저 아래 바나나 나무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황혼은 새로이 떠나며 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를 파견했다. 리우의 밤하늘엔 숨는 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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