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다른 이야기를 하려 들수록, 다른 이야기도 잘 되지 않을뿐더러, 말하여지지 않고 맴도는 우울이 더 성깔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우울을 말하지 않으려던 것은 어디까지나 공중도덕을 염려해서였다. 우울을 쓰레기로 간주해서,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준법정신의 발로였다.
우울을 말하지 않으려 했더니, 어쩐지 말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줄어들어 가며 더 우울해졌다.
우울을 사면하기로 한다. 대놓고 이야기하려 한다. 이렇게 방향을 틀어 놓고 나니 막상은, 우울이야말로 이 시대에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핵심적 주제라는 생각마저 든다. 즉 이것을 제쳐 놓고 다른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것은 어쩌면 간접적 거짓말이 되는지도 모른다.
내 일상에서 태반의 시간들은 우울과 가장 가깝게 얼굴을 맞대고 있다.
우울을 말하기로 하고 나니, 이 시대의 진정한 문젯거리에 한 발 다가선 듯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우울 게시판을 열고, 아픈 동물을 돌보듯 우울에게 일정 시간을 할애하고, 쓰다듬고, 격을 인정해주고, 세심히 말을 들어주고, 이런 일을 거듭하며 공생하기로 했다.
사연 같은 것은 적지 않을 것이다. 사연을 적는 순간, 이 사건 이게 과연 우울해질 만 일인가? 가 읽는 이들의 저울에 계량된다는 생각만 하여도, 우울은 얼굴을 붉히며 괴로워할 것이다. 우울은 오디션을 보거나 배틀을 원하지 않는다. 우울은 자격심사의 심판대에 오르는 위험을 치르지 않고서 그저 자그맣고 친절한 승인을 얻었으면 하는 비밀한 바람을 손바닥 사이에 조심스레 움켜쥐고 있다.
말하여 줌으로써, 처치 곤란한 상태의 우울을 다룰 수 있는 반경의 것으로 살짝 바꾸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