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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ug 05. 2021

나와 타인 그리고 시공간의 간극들




혼란했던 어제의 구김을 펴려는, 어딘가 다림질 같은 느낌으로 써가는 글.



내재된 절망의 주요 내역 중 하나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본들, 이 거대한 인류 사회의 얼개 속에 나 하나쯤, 인간 하나쯤의 중요도는 별 거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야 어쨌든 감수성의 차원에선 그렇게 느끼게끔 우리의 삶이 조성되어 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가속적이 되어버린 현대의 사회 속에 그 어느 누구도 충분한 생각을 위한 틈 같은 것은 갖지 못하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하나의 몫을 겨우 살아내기에도 빠듯할 뿐이다. 탓도 잘못도 아닌, 그냥 그런 것이다.



그 와중에 또 이런 상황과는 이질적 이게도, 중요한 것이란 있다는 듯이,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듯이, 각자의 마음은 형성되고 권장되며 삶의 시간 속으로 내몰린다. 



중요한 게 있으면 뭐하랴! 같이 멈춰서 공감하고 나눌 무리도 어차피 거의 만들어지지 않거늘! 



그럼에도, SNS의 폐해를 알면서도 자꾸만 무언가를 올리고 또 찾아보게 되는 건, 삶이라는 바다에 담겨있어야 할 이유를 매번 힘겹게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에 의해서. 논리가 아닌 정서의 차원에서.



이런 기분 때문에, 각자가 각자의 중요도와 의미와 가치를 꺼내어 말하는 자리에 가면 어느새 한껏 퀭하고 허한 마음의 상태로 가버린다. 

저 사람은 정말 저것에 중요도를, 어떻게 믿고 부여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에 잠겨.



내가 내 것에 대해 그렇게 하려고 할 때는 보통, 말에 힘이 안 들어가고, 아니 그러기 이전에 말들이 흩어져 버린 것처럼도 여겨지고, 마음속에서는 '이래 봤자, 이것은 내게 스쳐갔던, 그저 잠시만 반짝이고 의미롭게 여겨지던 무엇이고 마는 것일 텐데? 과연 남에게 떵떵거리며 말해도 되는 걸까?'같은 생각이 그치지 않는다. 


약간은, 바다에 잉크 한 방울 흘려보내는 정도의 느낌?


만약 내가 한 때는 중요했던 경험에 대해 이제 와 말하게 된다면, 이 정도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그땐 그랬지요."




현재라는 시간은 나 자신에게도 이미, 그 과거로부터 많이 떠나온 어딘가이고, 더군다나 '그 당시의 나'에게나 의미 있던 어떤 일은 타인이나 공중에게는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그러할진대, 이런 간극을 넘어서 '통하게'하려면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할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당사자 스스로의 입을 빌어 '중요하다'는 확신이 설파되기라도 하면, 그 마음을 상상하려고는 애쓰지만 이질감이 도는 걸 어쩌지 못하곤 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래 보인다.

나 자신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이 참담한 경험조차도,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의 말이나 글을 접할 땐, 나도 겪어봤기 때문에 조금은 더 잘 짐작되는 한편, 자신의 것만큼은 구체적이지 않고 어느 정도 추상화된다. 사람의 성품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렇게,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터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기 자신의 경험마저도, 과거 속의 내가 또 하나의 남인 것처럼, 방금 말한 '타인 효과' 비슷한 양태를 띠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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