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게 확장되지 않는 마음은 혼자 곯다 소진되는 것 같다.
적게 보다는 조금 더 많이 살아보니 그렇다.
교류를 통해 넓어지거나, 교환되어 섞여 다시 구성되는 과정 없이는, 하나의 개인 안에서 이를 수 있는 평정이라던가 고독의 경지는 어떤 허구가 아닐까 한다.
좁게 살다가는 마침내 숨 막힘에 이르러 더 갈 데가 없어진다는 중간 결론을 얻었다.
나라고 하는 영토란, 바다나 산맥과 같은 학식이나 지혜를 쌓은들, 그래 봤자 좁음을 면하지 못한다.
넓게 산다는 일이란 얼핏 그 어감이 던져주듯, 견문이나 사귐을 늘리는 데만 달렸다고는 볼 수 없다.
넓게 산다는 일의 필수조건으로서 오늘 떠오르는 것으로는, 억측하거나 오해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일부터.
왜냐하면, 오해하고, 오해하고자 하고, 오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좁음을 고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리라.
오해는 시비를 가려내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세상일은 오히려 시비에 담기지 않는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혹은 아마존 같은 구역이 있다.
시비 판별이 쉽지 않은, 혹은 꼭 시비를 당장 가려낼 필요가 없거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은 영역의 것들을 그냥 일단은 이 넓은 구역에 머무르게끔 돌려보내는 정도만 할 수 있대도, 마음의 지평은 달라질 거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상한 성급함이 있어, 이 모호한 넓은 구역의 존재를, 그리고 그런 구역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다지 참아내지 못한다. 가급적 재빨리, 눈앞의 현상이나 경험을 이미 알려진 시비의 영토로 얼른 돌려보내, 흑백이 분명해 보이는 푯말 아래 종속시켜야만 맘이 편해지는 것이다.
규명되지 않은 어둠이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가급적 혼란을 피하여, 이미 있는 가지의 분류체계 속으로 혼돈을 수납하고자 한다.
인간의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것은 개개인의 옳고 그름의 척도에 달렸다기보다는, 인내심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그런데, 더 쓰고 싶으나 키보드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젠장! 가뜩이나 인내심도 달리건만, 키보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