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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Nov 05. 2021

사회 속 마음의 감옥과 구원의 통로로서의 언어









인스타에 올라온 리뷰다. 

이분은 특히, 작중 화자의 아픈 시절 고백 부분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작중 화자는 어린 시절 주변의 보호로부터 이탈되어 성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지냈다. 보호해 주어야 할 당사자들이 오히려 짐승으로 바뀐 마당에,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이 자신 속에 고립된 채로 수십 년간을 지내야 했다. 

화자는, 30년간 요양원에 유폐되어 생을 마쳤던 카미유 클로델의 처지를 그려낸 연극이 촉매제가 되어 이 기억을 끄집어내 말하게 된다. 

그동안은 왜 말하지 못했을까? 이걸 꺼내 말하는 자체가 자기를 처음으로 존재케 해주었던 가족이라는 원초적 문명사회를 부정하게 된다는, 극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던 때문이다. 말을 해야만 자기가 인정될 텐데, 이 말의 과정 자체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 같은  아이러니에 묶여 버린 것이다.




리뷰


Posted @withregram • @mareignotum 1년 전에 햇빛을 덜 받은 테이블 야자는 약한 잎부터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었다. 초록에서 갈색으로 검게 변해가는 잎들을 가위로 잘라낼까 하다가 작은 잎들인 데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화분이라 들어서 그냥 자연 탈락할 때까지 기다리자, 그냥 두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녀석은 그 잎을 그냥 간직한 채 초록은 더 생생하게 크기도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아물어 간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끔찍한 기억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그저 아물 뿐이라니. 지나간 모든 일을 추억이라 부르지 않는 건 선택해서 기억하는 건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내 속에 웅크린 나쁜 기억들은 또 뭐란 말인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란 건 과학의 헛소리인가.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 했던 상처는 그냥 그대로였고 그녀는 그냥 어루만진 듯했다. 그저 자아의 나머지가 개 같은 기억과 공포를 압도할 만큼 웃자라서 당당해진 듯했다. 그런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쓰레기 무는 것 같아 담지 않던 욕을 중간중간 내뱉었다. 개자식들...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죽지는 말고 세 번째 다리나 부러져라.



 (이 부분은 댓글)


보라색 페이지들은 읽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고ㅜㅜ 연애소설을 써주시면 어떨까 상상했던 부분도 있었고^^ 마지막엔 죽어버려라고 저주하지 못하고 순한 욕으로 자기 검열한 제가 못마땅하기도 했어요.



(위 댓글에 대한 나의 답글)


교육, 일반 정서,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권력을 지켜주는 쪽으로 사용되고 종사하고 있어요. 용서나 화해, 이해, 수용, 이런 것들은 참 말은 좋지만 실제는 약자의 몫으로 떠맡겨지고 심지어 강요되죠. 아픔도 알아서 극복 못하면 지가 병신인 걸로 되어 있고. 권력의 문제로 귀결되더란요. 그 자체로는 미덕인 것들도 권력과 관계되어 어떻게 강조되고 사용되는지 봐야 하는데... 음, 아무튼 사람의 생명력을 말살하는 거대한 구조가 각종 이데올로기로 감싸 옥죄는 것 같아요. 늘 그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 대하는 기분이에요.




����


 축제는 과연 즐겁기만 한 것일까? 즐거움 속에서 음영은 더욱 짙어진다.

 

게다가 나는 인간 조건, 특히 사회 속 여성의 열악한 입지와 소외를 거울처럼 아프게 비추어주는 한 편의 통렬한 극을 보고 난 참이었다. 생애의 남은 30여 년간을, 자기 처지를 소명하지 못한 채 요양원의 정서 감옥 속에서 마쳐야만 했던 카미유 클로델. 소통을 통한 구원이라는 통로가 봉쇄당한 채. 



최근 <바람구두를 신은 피노키오>를 세상에 내보내기 전의 내 의식 상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도 그녀처럼, 제대로 된 이해와 소통을 체념한 채 침묵 속에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겨가고 있을 뿐이었다. 



샤를르빌 인형극 축제에 소개되어 기립박수를 받은 바 있는, 이 카미유 클로델 연극에 대한 나의  반응은 책 속에서 기다란 독백으로 이어진다. 내가 품어온, 과거의 벙어리 인형의 봉인이 풀리는 시점이었다. 인형극을 보고 난 파문이 마음속에 또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작중 화자가 겪어온 특이한 경험 세계와 심리적 입지는 그녀가 스스로를 이 사회 속 변방을 떠도는 집시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 연관을 빌어 본다면, 이후 그녀가 대학 신입생 시절, 집시치마를 입고 에스메랄다로 불리는 것조차 하나의 낭만이자 멋으로서가 아니라 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녀의 이러한 정서가, 심연을 낱낱이 비추고 건드리는 정교한 굿과도 같은 예술이자 엄연한 독립 장르임에도, 그간 오해와 편견 속에 묵묵히 걸어온 인형극이라는 장르에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한 일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는 나눠서 해야 할 것 같다.














인형극들에 비추어 그녀가 들려주는 성장 일화들은 순전히 개인적이라고만 보기엔, 우리 사회의 깊은 그늘을 아프게 들추어냅니다. 이러한 견본으로부터 독자들은 인형극에 대해 기존 관념을 벗고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한 편의 '회상과 치유의 인형극'과도 같습니다. 아픈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이 음양의 스펙트럼으로 교차되면서, 우리 모두가 마리오네트 인형들처럼 가담된 이 삶 자체를 인형극처럼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계 인형극 축제 속에서 찾은 반딧불 같은 삶의 순간들!

한국 최초 인형극 에세이,

<바람구두를 신은 피노키오> , 전국의 교보와 영풍 매장에서 판매 중.


온라인 구매는 여기로. 

   https://linktr.ee/ulfe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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