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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란 말 뒤에 오는 것들

by 래연




할 말이 없어져가는 건,

밖으로 나오려는 말들 앞에 '굳이'를 붙여서이기도 할 거다.

굳이라는 문 앞에 굳어버리는 것들.


애초에 산다는 게

의미를 전제하고 확인한 후에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삶이란 어떤 불가항력처럼 생성되고

얼마간 그렇게 진행되는 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자연.

자연 앞에 굳이를 붙이기 시작하면

생명력을 지닌 것은 얼어버린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는 말.

애초에 이유가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굳이 중요한 것이 있다면

계속 꿈틀거리는 것이다.

태어난 바 생명답게.

사회가 아무리 차려 열중 쉬어를 시킨들.


말도, 모든 말이 목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있어온 바 없는 의성어가 우러나와 밖으로 질러지듯

솟아나는 무엇이다.


굳이 목적 없이는 말하지 않겠다면

하나 만들음 직도 하다.

어법이라도 만들어보겠다는.

말을 하는 것도 취미일 수 있다.

의사전달과 소통이라는 용도로서의 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유하다시피 한 감정을 표현할 때조차 왕왕

누군가들이 만들어놓은 기성품 같은 말이 사용되곤 한다.

갖다 쓴다는 편리.

말이나 표현도 좀 핸드메이드로

각자의 다름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


사람이 각자 다 다른 개체로 태어나는 건

물론 살아가는 와중에 보편적이 되는 걸 배우고 연습하지만

단지 표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르게 태어났으면

그 각각의 다름을 피우는 것도 개체에 주어진 사명 중 하나다.


백합꽃 다발을 같은 물에 꽂아놓아도

피어남의 정도와 모양새가 다 다르다.

끝내 봉오리에서 멈추는 아이들도 있다.

나를 닮은 무언가가 만들어져 나올 때

상당히 기껍다.

굳이 태어나야 했던 개체로서의 나가 조금 밝혀진 것도 같아서.


무엇이 다른 무엇에 의하여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면

무엇의 존재 의미가 희석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열을 떠나 나만의 것이 있을 때

분명히 그만큼 삶은 즐거워진다.


이 글을 시작할 때

굳이 하려던 이야기가 뭔지를 몰랐다.

하다 보면 무언가를 말하게 되면서

길이 만들어지고 나는 그 길을 타고 간다.

뭔가 될지 모를 이야기를 굳이 하려는 게

내 모든 이야기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내 모든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씌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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