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May 09. 2024

프랑스에서 한글을 가르쳐주다




    2학기 시작과 더불어 나는 새로운 이름을 준비했다. 조에Zoé라는 이름이 그것이었다. 내 이름은 ‘h’가 들어가 프랑스인 선생님들이 발음할 때 애를 먹는다. 가장 힘들어한 사람은 카롤린이었다. 첫 시간에 내가 이름을 말하자 난감한 얼굴이 되어 도대체 어떻게 발음하는 거냐며 자세히 듣기 위해 점점 더 한 발짝씩 내 앞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형’자를 비슷하게 될 때까지 몇 번씩이나 다시 고쳐 발음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조에라는 이름을 말해주었다. 카롤린은 그제야 안심했다. 


    이후 모든 선생님이 다들 나를 이 조에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미 내 본명을 알고 있던 나탈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방학 동안에 국적을 바꿨냐고 했다. 내가 이름을 굳이 하나 더 만든 것은, 원래 이름의 발음이 거추장스러우면 내게 말을 덜 시킬까봐, 보다 더 편히 불리고 싶어서였다. 요즘 프랑스는 오히려 좀 더 옛날풍의 이름 짓기를 선호한다는데 조에도 그런 우아하고 고전적인 이름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 이름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또 하나의 자아인 셈이었다.


    밀레나의 월요일 외 나머지는 자닌이라는 선생님과 함께했다. 이 선생님은 주로 풍속과 문화 주제들을 다루어 흥미로웠으나, 평가에 어찌나 기준치가 높은지 숙제 교정본을 받는 날이면 내가 굉장히 무능한 학생이 된 것 같은 열등감이 밀려왔다. 관사와 동사 시제 등을 능란하게 다루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듯했다. 프랑스어 문법에 농락당하는 느낌이었다. 자닌은 학생들에게 고도의 ‘표현의 적절성’을 요구했으므로 문법적으로 맞더라도 완전히 적절한 표현이 아니면 틀린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도대체 만족시킬 수 없는 그 엄밀함에도 불구하고 자닌의 선생으로서의 품위와 인격은 감탄을 자아냈다. 숙제를 빼곡히 수정하여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해주고 잘 해야 B-정도의 학점을 기입한 후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오류가 발생하는 듯한데 그래도 네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는 식의 코멘트를 넣었다. 사실 나의 과도한 노력이 오히려 에러로 이어지는 일이 잦았다. 자닌은 이에 대해 또, ‘너는 단어를 너무 찾은 것 같다. 좀 더 단순한 낱말을 쓰도록 하라’, 또는 ‘고심하여 사전을 찾아 쓴 것이 문장 맥락에 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식의 조언을 남기곤 했다. 더욱이 그녀는 학생에게 존대하는 몇 안 되는 선생님이었다. 글에서도 항상 ‘부’vous(당신)라 칭했다. 이 존대어법이 동양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편했다. 


    자닌은 적어도 환갑이 넘었으되 군살 없이 매끈한 몸매에 흐트러짐 없는 헤어스타일과 세련된 옷맵시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 펜슬라인 스커트와 부츠로 감싸인 날씬한 다리 그리고 휘날리는 트렌치코트 자락의 라인이 눈에 선하다. 나중에 3학기 담임 테오도라는 자닌이 어찌나 완벽한지 선생들끼리의 사석에서조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닌의 안경 너머엔 인자하고 위트 어린 할머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의외로 대부분의 서양 아이들은 자닌을 무서워했다. 자닌의,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시키는 방식에 공포심을 느끼는가 하면, 소그룹 토론 때 조마다 돌아다니며 귀를 기울이고 학생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노트에 뭔가를 적는 모습에 학생들은 긴장하곤 했다. 종종 앙헬리카는 자닌을 흉내냈다. 암튼 자닌의 지엄한 분위기 탓에 한 학기의 발표순서를 정할 때 대다수의 학생은 거의 모두 키 큰 밀레나를 택했다. 오죽하면 밀레나가 웃으며 “자닌은 너희들을 잡아먹지 않아.”라고 했을 지경이다.





겨울에도 따듯한 Pau에는 드문 눈






    이번 학기의 발표에는 선택 사항이 있었다. 논의의 쟁점이 될 만한 사안을 한 5분 정도 발표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해 남은 한 시간 동안 친구들과 토론을 벌이거나 혹은 종래의 방식대로 앞에 나가 자기 나라에 대해 20분 정도 발표를 하는 것이다. 누가 한 시간짜리 토론을 원하겠는가. 전자는 제시되었지만 실현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모두가 자기 나라에 대한 발표를 택했다. 


    내가 하기 직전에는 이미 스코틀랜드 친구인 카트리나와 콜롬비아의 앙헬리카, 브라질의 레오 등이 발표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기 나라에 대한 개괄적인 언급만 해도 시간이 무척 부족해 보였다. 간략한 역사 및 영토 크기와 위치, 지리적 특성, 나라의 상징물들, 유명한 인물들, 정치 관계, 특산물 등의 이미지들을 프로젝터로 보여줘 가면서 하는 이 과정은 실제로는 통상 30-40분 이상 걸렸다. 특히 자닌은 정한 시간 내에 분량을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지만, 애국심이 넘쳐나는 학생들은 매번 많은 내용을 보고했고 사실상 시간제한은 무의미해졌다.


   


나는 이쯤에서 생각했다. 앞서 한 친구들을 보니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개 비슷한 형식이 되어서 일면 지루한 데다, 우리나라를 이야기하자니 나라에 연루된 감정들이 비집고 나와 나 자신 민족주의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불현듯 방향을 바꾸어, 나라 전반에 대한 소개 대신 일부 주제로 압축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채택한 소재는 ‘한글’이었다. 일단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취지를 설명한 다음, 아이들에게 자음과 모음 표를 나눠주어 종내는 그들이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내가 언어 자체를 주제로 삼아서였는지, 언어 교육을 업으로 하는 자닌은 내 발표를 흡족해했다. 


    이날 내 발표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부터 포에는 꽤 드문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종일 휘몰아쳤다.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이전 14화 한 마리 고양이가 정원에 있어요, 는 이제 그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