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은 하루 종일 키 큰 밀레나와 함께였다. 훤칠한 키에 긴 커트 머리의 중성적인 그녀는 아이를 무려 셋인가 넷 두었지만 그럼에도 몹시 시크했다. 이 키 큰 밀레나에 대해 어느 대학원생은 ‘이페르 셍파hyper sympa'(아주 호감 가는)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멋진 것은 사실이지만 수업에 관한 한 나는 좀 힘들었다. 그녀는 특히나 정치적 이슈를 좋아했는데, 정치 관련 신문 기사들의 풍자적 뉘앙스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잘 번역되지 않기 때문에 적응이 힘들었다. 또 프랑스인들은 데바débat(토론)를 정말 좋아하는데 나는 이게 피곤하다. 나는 사람마다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 각각의 정의를 갖고 있기에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출발하는 말 겨루기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도 여기 선생님들이 모든 현안마다 눈의 불을 켜고 당일 신문을 들고 와 사르코지나 교황 비판에 침을 튀기는 모습은 고무적이었다. 권력에 대해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정치 주제나 토론을 고문으로 여기는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어서 일본 친구 유카리는 밀레나의 수업을 처음 딱 두 번 출석한 이후 초지일관 결석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밀레나가 이렇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도대체 유카리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겠어.”
유카리는 다분히 서구화된 일본인이다. 일본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핏줄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남미 에콰도르인가에서 몇 년을 지낸 바 있다.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자닌은 유카리가 남미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인 특유의 억양이 이미 다 사라져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그녀의 프랑스어에도 일본 억양이 전혀 섞여들지 않는다고 말한 적 있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쉬는 시간에 커피 머신 앞에서 유카리와 레오, 베리반 등이 자주 어울려 있었다. 유카리는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를 비교하며 말하기를 한국 여자들은 어쩐지 옷 색깔로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여자들은 무채색보다는 색감 있는 옷을 주로 입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관찰을 해 보니 그녀 말이 맞는 듯도 했다. 일본을 비롯해 다른 나라 친구들은 어쩐지 좀 더 가라앉은 톤의 옷들을 입는 듯했고 프랑스 사람들은 특히나 좀 더 무채색들을 선호하는 듯이 보였다. 또 일본 여자들 특히 소녀들은 서 있을 때 귀여운 척하는 매무새를 잘한다고 했다. 유카리는 무릎을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서는 모양을 직접 재현해 보였다. 이 두 번째 학기는 다국적이었으므로 각 나라 특색에 대해 여럿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유카리처럼, 싫은 것은 내팽겨치면서 살고 싶다. 그러나 이런 바람과는 달리 나는 어떨 땐 종종 싫은 것에까지 열과 성을 다하려 드는데 하필 밀레나 수업에서도 그랬다.
밀레나는 우리 상급반 수준에서 달성해야 할 학습 목표로 ‘에스프리 프랑세(프랑스적 정신)을 포착할 것’을 제시했고 소위 '로지크 프랑세즈’(프랑스적 논리)에 단련시키고자 채찍을 들었다. 그녀는 첫 시간에 못을 박았다. “일 리야 엉 샤 덩 르 자르뎅, 세 피니!"Il y a un chat dans le jardin, c'est fini!(정원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이런 공부는 여러분들한테 이제 끝났어요!) 단순하고 낭만적인 프랑스어 습득의 시절은 갔다는 얘기다. 이후로는 프랑스적 논법에 익숙해지기 위해 수많은 논리연결어들을 익혀, 주장하려는 요지를 중언부언 없이 앞뒤가 딱 맞는 논리적 문장으로 구성해내야만 한다. 동화도 상상력도 안녕이었다.
논술의 시대를 여는 밀레나의 첫 번째 숙제는 ‘식민 시대는 종결되었는가?' 였다. 이 식민지 문제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많았다. 심지어 나는 우리나라의 현재의 많은 부조리한 사회상이 거의 식민지 경험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점령은 우리나라를 문화적, 정신적으로 지우는 지우개 역할을 했고 그 험한 통치 속에 사람들은 발을 뻗고 잘 수 없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그 지우개 때문에 거대한 기억 상실에 걸린 우리나라는, 유서 깊은 스승의 나라였던 우리는 식민 이후엔 사상과 가치의 아노미 속에서 정신적 뿌리를 잃고 혼이 빠진 사람들처럼 일본이 이식해놓은 서구 문화를 맹목적으로 숭상하도록 길들여진 어린애가 되고 만 것이다. 내가 느낀 근대사는 이랬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삐걱이는 가운데 내 생각에 가장 나쁜 것은 교육이다. 일제의 잔재가 전혀 씻기지 않은 교육의 틀이 마치 거대한 덫처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생명력을 속박하여 갉아먹는다. 나도 그런 체계 속에서 신음하며 나의 젊은 실존을 갖다 바쳤다. 지금에서야 고갈된 마음을 복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여기 프랑스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내 피와 살이 결부된 주제를 어떻게 글로 소화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논리적 글짓기에 필요한 심적 거리 같은 걸 유지하기 힘들 터였다. 결국은 마음에서 피를 쏟는 심정으로 작문을 했다.
내가 느끼는 식민의 가장 심각한 면은, 그것이 우리 정체성을 잠식하여 민족의 자아에 집단 무의식적 자기혐오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SNS 공간을 보면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돼.’ 식의 정서가 수시로 묻어나온다. 마치 어떤 못된 남편에게 맞고 살아온 아내가 ‘난 맞아도 싼 여자야.’라고 믿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국가 차원에도 있다. 이런 집단정서 속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 문제도 오려낸 듯 멀쩡하게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하여 논리적 글짓기에 필요한 심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게 숙제가 되기 위해서라면 적당한 분량에 논리적 전개만 담으면 충분한데도 나는 민감한 주제에 자극된 나머지 담담해지기 힘들었다.
돌려받은 숙제에는 ‘매우 흥미 있음’이란 평가가 적혀 있었다. 밀레나가 그렇게 쓴 의미는 다른 거였겠지만 표현 자체의 가벼움 때문에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다.
수업 중에 편치 않은 적이 또 있다. 선생님은 나더러 식민 받았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식민 후유증에 대해 말해 보라고 했다. 또 식민지 타령. 그러니 식민이란 걸 당하고 살지 말아야 한다! 이때 나는 과거 일본이 점령 때 한국 역사를 왜곡 날조했다고 말했는데 밀레나는 당황스런 기색으로 급히 끼어들어선 “지금의 일본이 아니라 그 시절의 일본 정부가”라며 나의 발언을 완곡하게 정정하고자 했다.
그녀는 현재와 과거를 분리시키고 일본 국민과 일본 정부를 분리시킴으로써, 수업에 참여 중인 세 일본 학우들의 감정을 사전에 구제하려 했으리라. 역사라는 것이 강자의 논리와 편의에 맞추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못마땅했다.
나는 이 순간부터 시사 정치 토론에 얼마간 마음을 닫았다. 말이 토론이지, 민감한 주제들 앞에서는 프랑스적 논리는 허울이 될 뿐이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작문의 분량을 대폭 줄였고 글 안에 그다지 진심을 담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논리를 구성했다. 무엇에 대해서도 이슈를 만들지 않았다. 이 수업에 대한 기대를 대강 접고 설겅설겅 임했다. 그러한 마음 닫음의 결과로, 이후 작문들에는 ‘발전했음’, ‘구조적으로 나아짐’ 등의 평가가 주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