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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pr 29. 2024

긴 바캉스와도 같은 어학연수



       


인연은 가고 

또 오고  


    에리나가 기숙사로 귀환할 즈음해서야 드디어 보르도의 오피로부터 병원 출석 요구서한이 도착했다. 집 근처, 피아노처럼 생긴 빌딩 바로 옆 병원에서 간단한 건강검진 후에 체류 스티커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의 과정은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그 전날 수입인지를 사러 돌아다니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신체검사 중 시력측정을 할 때는 나중에 잰 눈의 시력이 먼저 잰 쪽보다 떨어졌는데 나는 이 원인이, 한쪽 눈을 눌렀던 직후에 곧장 측정해 그런 것 같으니 다시 하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다시 잰 결과 시력을 0.1 더 올릴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다음 날 곧장 카프에 가서 알로카시옹allocation(주택보조금)을 신청했다.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반짝이는 별과도 같은 이 알로카시옹, 꼭 해야 하는 사무다. 준비서류는 채워야 할 난이 많고 복잡했다. 무지했다가는 주택보조금이고 뭐고 못 받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성진 씨는 끝내 이걸 못 받은 채 프랑스에서의 9개월을 마감했다. 이 서류 중 일부는 집 주인이 작성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는 주인이 학교 기숙사이니 기숙사 사무실을 찾아가야 했다. 마침 방학이고 크리스마스 전후라 그곳은 심심하리만치 한가했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좀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던 마담이 갑자기 친절하게 돌변하더니 물어보는 모든 것에 친절히 대답해주는 것은 물론 서류 전체를 꼼꼼하게 점검해주었다. 더 해줄 것이 없냐는 듯이, 알아서 손봐주고 일일이 기입해주었다. 덕분에 나 혼자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릴 사무가 단 3분 만에 끝났다.




피아노라는 이름의 건물








    카프에 가서 서류제출과 더불어 상담 비슷한 걸 마치고 나면 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이후 카프에서 서류도 날아오고 캬르트 알로카테르carte allocataire라는 카드도 도착하지만 도무지 이 카드를 어떻게 써먹는 건지도 모르겠고 서류는 역시 해독불가능이다. 나의 환상 속에서는, 기구에서 모든 수속이 처리되고 나면 혜택받은 차감금액이 저절로 내 통장 계좌로 착착 입금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세 달이나 기다려도 그런 즐거운 일은 일어나주지 않았다. 속을 끌끌 태우다 다시 카프와 기숙사 사무실을 차례로 들러서야 그 방식이 내 계좌로의 입금이 아니라 임대인을 통해 지급됨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 측에서는 내가 여기 도착한 이후 이미 낸 월세들의 환급금과 앞으로 남은 기간의 환급금을 모두 계산하니 그것이 정확히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의 기숙사비에 해당한다고, 그러니 이제 월세를 그만 내면 계산이 맞는다고 했다. 그제야 나도 프랑스 주택보조정책의 정당한 수혜자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잠깐일 뿐이지만.



    개학 며칠 전 에리나가 돌아왔다. 파리로부터 작은 선물과 함께. 그리고 에리나가 들고 온 것은 선물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물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이야기 꾸러미까지 펼쳐 보였다. 에리나는 기차에서 잘 생기고 진지해 보이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그 청년은 내리기 직전 에리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에리나는 프랑스어를 겨우 한 학기밖에 안 한 상태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좌우지간 그가 에리나에게 호감을 나타낸 것은 분명했다. 에리나는 여운과 떨림을 간직한 채 몇 정거장 더 지나 내린다. 이후에도 그는 ‘보고 싶다’며 여러 개의 문자를 보내왔으며 우리 도시로 조만간 방문한다고 했다. 외로운 에리나에게 애인이든 친구든 생겨준다면 마음도 달래고 프랑스어도 금방 늘 것이었다. 이 소식에 나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이벤트의 순조로운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청년은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리나를 만나는 건 별개의 일이라는 듯 굴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식 ‘양다리의 미학’이었는지. 각자의 욕구에 위선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이해가 가지 않을 것도 없지만, 한때는 소중했던 누군가가 나중에는 어째도 상관없이 되어버린다는 건 슬픈 일이다. 이후 에리나는 같이 술을 마실 때 종종 자기 인생에 사랑만큼은 주어지지 않는 어떤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감정도 호기심도 아이처럼 커다란 에리나라면 반드시 누구하고라도 감정적 연루가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에리나





    개학이 가까워온다. 기말분반고사에 따른 반배치 결과를 보러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 우리 건물 로비 게시판에 이르러 상급반 명단을 보니 내 이름이 없다.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중급반 명단을 보니 거기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아방세반(상급반)이 하나 더 개설된 것이다. 내 이름은 더 상위의 상급반에서 발견되었다. 이제 가장 상급반. 몰려오는 성취감. 게다가 경사스럽게도 상급반 이상은 학비가 더 싸서, 중급반 기준으로 세 학기 비용을 모두 지불했었던 나는 환불까지 받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유학원에 이메일을 보냈다. 


    분반과 관계하여 누구에게나 희비는 교차되었으리라. 태평한 버지니아는 희망대로 중급반에 남았고 슈네이드는 결석일수가 많아 거의 진급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하굣길에는 민지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한 단계밖에 상승하지 못하여 에리나와 한 반이 되었다. 그녀는 담담하지만 실망이 깃든 목소리로, “저는 아방세 가게 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반 구성원은 지난 학기보다 많은 16명이었고 이번에는 최소한 일본 친구들만도 미츠요를 포함하여 세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나도 동양인들과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학 수업이 첫 수업이었다. 우리는 젊고 재기 넘치는 카롤린과 함께 했다. 그녀는 예쁘고 예민하며 제스처의 변화가 빠르다. 강의의 세부에 집중해 들어갈 때마다 동그랗게 치켜뜬 그녀의 눈은 흰자위가 드러나곤 했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 된 사람이다. 그녀는 실로 내게 쓰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즐거움 말이다. 그 계기는 이번 학기 수업 중에 일어나게 된다.


    낯선 친구들과의 첫 수업인들 이제는 첫 학기만큼 긴장되지는 않는다. 내 왼쪽에는 쿠르드(도대체 이런 나라가 있는지조차 몰랐다)의 베리반과 그녀와 같은 반이었던 단짝 미츠요가 있었다. 이지적인 소년처럼 또렷한 이목구비에 안경을 걸친, 두드러지게 영리해 보이는 베리반은 흡사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예 같았다. 그녀는 시내에서 남편과 함께 케밥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이름 또한 ‘메소포타미아’였다. 그녀는 미츠요와 늘 붙어 다녀, 나는 그 둘을 부부 같다고 놀렸다. 






    내 오른쪽에는 희끔하니 추워 보이는 얼굴의 키 크고 잘 생긴 올리버가 세련된 하이넥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아이다호에서 왔다는 올리버는 전 학기에 복도나 컴퓨터실에서 자주 눈에 띄었는데 마치 브래드 피트처럼 보였었다. 나는 그가 프랑스인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는 심지어 영리해서 기초반에서 최상급반까지 한 학기 만에 월반했으며 여기다가 그의 절대적으로 적은 말수 그러나 요점만 정확히 짚어 말하는 말투는 그의 후광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적은 말수가 비사교성의 표징이 되는가 하면 그 누구에게는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쓸 만한 침묵은 달변보다 가치 있었다. 그는 겨우 스무 살에 이미 유부남이었고 그들 커플은 온통 그림 같았다. 짧은 머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코트와 클로시 스타일의 모자는 부인 조지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무척 어울렸다.


    이윽고 카롤린느는 우리를 둘러보다 올리버에게 물었다. “사 바?"Ça va?(괜찮니?)  

    올리버가 답했다. “주 쉬 프루아."Je suis frois(전 추워요.) 

    카롤린은 그 표현이 ‘주 쉬 모르'Je suis mort.(나는 죽었다.)와 같은 의미라며 춥다는 말이 되게 하려면 동사를 바꾸어야 한다고 고쳐주었다.




    그 다음은 의례적인 자기소개로 이어졌다. 이렇게 휘리릭 지나가 버리는 16명의 자기소개는 대개 뇌리에 드문드문 입력될 뿐이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이러저러한 작가를 좋아하고 인간 본성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있어보일 것 같아서였다. 다른 학생들의 인상이 내 기억에 희미한 것은 그 어느 학생보다도 카롤린의 존재감 자체가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하는 방식은 흡입력이 강해서 꽤 집중하게 된다. 카롤린은 자기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준비해 온 프린트물을 재빨리 휙휙 돌렸다. 그것들은 이번 학기 커리큘럼과 당장 오늘 나갈 진도였다. 첫날인 오늘은 아니 소몽Anni Saumont의 단편을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읽었다. 문장은 매우 간결했으나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이걸 읽으며 주말을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상급반에 가게 된 것을 기뻐한 것도 잠시, 왠지 고생문이 열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카롤린은 활기 넘치는 데다 시간을 몹시 아꼈다. 포즈(쉬는 시간)는 딱 5분가량만 주었는데 그것은 화장실 다녀오고 커피 한 잔 뽑을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항상 아주 빨리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수업 후 커피 머신 앞으로 미츠요가 다가왔다. “네가 나보다 훨씬 잘 하는 것 같으니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해야겠어.”


    그러나 미츠요의 이런 결심도 잠시 뿐, 그녀의 성실함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2학기 중반부터 미츠요는 각종 시험과 숙제들을 내팽겨치고는 영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각종 파티를 즐기고 친구들과 모여 여행 계획을 짜거나 했다. 차라리 고무적인 거였다. 상급반의 교육 방식은 특히 동양 학생들에게는 적응 안 되는 것이어서 어느 시점에서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프랑스어로 먹고 살 것도 아니고 일본에 있을 때 은행원으로 일하던 그녀에게 어차피 이 연수는 나의 경우처럼 그냥 긴 바캉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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