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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pr 25. 2024

피레네 대로에서 21세기의 나에게




  


끝없이 출구를 찾고

마음 놓을 그릇을 빚는 일이 

삶의 여정이 되었으므로

도자의 화덕은 어느새 

즐비해졌다   



  

    내가 이렇게 지내는 사이에 연말 가까이 성진 씨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까지도 그는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귀국이란 곧 요양을 의미했다. 

    그는 떠나기 전날 우리들을 불러 냉장고를 비울 겸 남은 야채들로 튀김을 만들자고 했는데 또 이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튀김에 부족한 야채들 장 본 것들을 레 알(시장)에 다 두고 오는 바람에 결국 집 근처에서 다시 사야 했다. 이런 번거로움을 지불한 끝에 냉장고의 잔여물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불리는 꼴이 되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의 튀김과 야채에 얹어 자신이 쓰던 모든 물건들을 ‘아직도 꽤 이래저래 유용하다’는 말과 더불어 내게 떠안겼다. 물주전자와 밥솥, 스탠드처럼 쓸 만한 하드웨어는 에리나에게 주겠다면서 그녀가 올 때까지 우선 보관의 명목으로 내게 맡겼다. 그가 내게 떠넘긴 식재료들로 말하면 언제 사 처박아 두었는지 모를 피쉬볼, 스테이크를 비롯하여 토닉 워터 등 별별 것들이었는데 나는 딱히 거절할 명분을 못 찾고 있다 그만 떠맡고 말았다. 일단은 내 주방에 그것들을 쌓아 두었다. 그다음 날 일어나자 문득, 가는 길에 내게 쓰레기 처리를 한 그가 미워졌다. 그리하여 나의 영역에서 그 물건들은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그가 떠난 다음 날은 케이와 함께 루르드를 방문했다. 루르드에 유별난 관심이 있기보다는 단지 포에서 20분여 만만한 거리여서 나선 나들이였다. 루르드는 썰렁했다. 레스토랑과 기념품점들은 고스란히 닫혀 있었다. 휴일에다 바캉스 기간인데도 신자들은 성스런 물에 질병이 씻겨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에 모여 있었지만 나는 신앙인이 아니라 그런지 별다른 치유의 기氣는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짧은 여행으로부터 케이는 신종플루로 의심되는 고열을, 나는 좀 독한 감기를 얻어왔다. 모든 이들이 구원받고 돌아가는 곳에서 병을 얻어오다니, 저주받은 우리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밝았다. 우편함에 에리나의 엽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비둘기 울음마냥 이런 말로 시작한다. “쿠쿠Coucou....”

    에리나는 파리에 가 있다. 다정한 에리나는 파리나 다른 곳에 다녀올 때면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치는데 또 그럴 때마다 매번 자기 자신의 주소로 스스로에게 보내는 엽서도 잊지 않는다. 이런 세레모니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삶의 시간들을 사랑하는 그녀의 방법이거나 자기 자신을 잊지 않으려는 다짐, 이 해석이 맞느냐 물어보는 대신 따라쟁이가 되어 흉내내고 싶다.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라는 게, 시시각각 스스로에게 전보를 전송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니 말이다. 한 80을 산다고 쳐도 나의 나이는 이미 접혔다. 나머지 반쪽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비관하고 놀고 나른하게 있어온 모든 날들을 벌충해야 한다. 위대한 업적을 쌓고 으스대며 살고 정신없이 부지런해지겠다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들의 논에 시간에 대한 나의 사랑을 빼곡이 심고 싶다는 것이다.      


    중학생 무렵, <도망자 로간>(원제 Logan's Run)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SF 적인 모호한 배경의 폐쇄된 공동체가 있는데 이 세계에서는 서른 살 이상은 살 수 없다. 서른이 되면 모두의 전송을 받으며 의식을 치르듯 떠나게끔 되어 있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 혹은 그것을 가장한 어떤 세력에 의해 이른 생을 마감한다. 다들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생사의 방식에 의문을 품는 자는 드물다. 더욱이 실제로는 죽음인 것을 여기서는 죽음이 아니라 ‘환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로간은 이 공동체에서 소위 환생을 의심하는 그 드문 몇몇에 해당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동반자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유니크한 플롯이다. 그 세계가 전부라 믿고 살았던 로간들은 공동체 밖으로 탈출함으로써 비록 자기 공동체 사람들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울타리 밖의, 서른 너머 여전히 생존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을 접하게 된다. 그들이 나고 자란 사회의 모습은 최선 혹은 전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군가들의 편의에 의한 임시적 설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드라마가 깊이 각인되어 줄곧 잊히질 않았다. 내가 사는 인류 사회의 사는 방식은 로간의 공동체와 다를 것인가? 결국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려면 사회 유지를 위한 임의적 설정에 부여된 절대성을 벗겨내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니 나를 둘러싼, 또 내 안에 이식된 칩들을 낱낱이 검토해야 했다. 



    또 그즈음, 내일이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 관련 책을 몰두하여 읽었다. 그 시기에 그만큼 몰입되는 책은 드물었다. 1999년이 될 때까지는 99년 종말설이 공공연했으므로 거기 맞춰 나의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았었다. 도망자 로간처럼 나도 다른 우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앉아서 종말을 맞아야 할 것 같았다. 이 독서 덕분에 인식론적으로는 내게 1999년 이후의 삶이란 막힌 어떤 것이었다. 감수성의 차원에서, 세기 마지막의 도래와 더불어 ‘종점’에 도달했다는 의식은 만인 공통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몇 년도 이후 출생자에 이르러서야 이 세기말 정서에 노출되지 않은 생의 시간들을 갖기 시작했을까? 공동의 불안이라는 실이 빠져나간 그들의 스웨터를 한 번 빌려 입어보고 싶다.

    나는 내 서른 살 이후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래 살아 있을 줄 몰랐다. 심지어 취기에 젖어 섣부른 심장은 멍청하게도 22살 즈음 젊음의 느낌이 영원할 줄 알았다.     






    20세기에 내 형성기를 모두 보내고 나니 지금 21세기가 모든 챕터들 끝의 종합편 같다. 21세기에는 더 이상 새로운 뭔가는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게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으로 뒤섞이고 조합만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비틀즈도 아바도 더 이상의 마이클 잭슨도 나오지 않을 거 같다. 온 거리를 휩쓰는 짠한 멜로디나 리듬에 마음을 빼앗겨본 지가 오래다. 영화들은 관객의 속도를 추월하게 매일 쏟아져 나와서는 죽을 때까지 다 보지 못할 만큼 범람한다. 정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것들 속을 매일 헤엄치지만 실상 어망은 비어 있다. 삶의 방식에 대한 팁이나 각종 권유들은 넘쳐나는 나머지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것들이 도로 목을 조를 지경이다. 좋다고 다 취할 수 없는 제한된 인생인데, 이것도 저것도 속속들이 필요하다고 속삭이고 군림하려 드는 것들, 소진시키는 주장들 앞에 ‘∫’인테그랄 부호가 필요하다. 어지간히 무심해지지 않으면 미토콘드리아가 폭발할 지경이다.


    갖은 정연한 가치들이 서로 기만하는 이 시대, 텅 빈 풍요를 틈타 모순이 위장취업을 한다. 윤리는 구세대적 화장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동시대인들은 퍼즐의 겉만 맞추어놓고 살기에 급급한가 하면, 기껏 예쁘게 차려입고선 팔자걸음 걷는 여자들처럼 어긋난 구색과 타협하기도 한다. 혹자는 행복을 사재기하려고 발버둥친다. 


    어차피 늘 새로운 태양 아래 영원히 낡은 인류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 견고한 지침을 찾아 보장받을 결론만을 추구하며 어떤 전형을 모방하려 해봤자 오히려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할 것은 자명하다. 진짜 불행들은 보험의 치외법권에 놓이므로 어떤 보험을 든들 우리는 어차피 사각지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순간을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할 이유다. 








    금세기의 가짜 약장수들이 흩어진 마당. 고전적 교육을 입고 자란 싱거운 내가 이 세상에 낄 데가 어디 있을지. 나는 현대라는 용매에 잘 녹지 않는 용질이다. 그런데 내가 고집 센 용질일 뿐더러 실은 용매도 수상하다. 엄청난 속도의 회오리 속, 과거의 학습은 큰 쓸모가 없어져 앞으로의 나날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 만들어 살아야 하나 싶다.


    누가 가르쳐준 적 없는 방식을 만들어 살아야 하므로 적적하다. 돌아가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여 사막의 이틀, 그리움에게 베개를 받쳐준다. 내가 소묘하는 삶의 모양새란 조건화된 무엇이 아니다. 지금 나는 행불행의 개념이 닿지 않는 지대에 거주하려 한다. 야망 부추기는 사회에 굴하지 않고, 농익은 가시로 내 살을 태우며 인적 드문 오솔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첩첩이 나를 에워싸던 그 불순한 경계들로부터 달팽이처럼 느리게 몸을 빼면서도, 반란을 도모하는 물수제비 조약돌의 입을 나는 얻을 것이다. 문명에 갇힌 나의 울음의 치어들을 하나하나 방생하면 그뿐, 내가 이 삶에 바라는 게 또 있을까?       




       

눈물인형   


  

방울방울 울음을 꿰어

인형을 빚는다 

물로 된 스펀지 너를 

런웨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한 번 걸어가게 해 본다면

더는 내보낼 포효가 마를 때

미래가 새겨진 구슬들을

한 개 한 개 게워낸 다음

out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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