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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pr 22. 2024

크리스마스 이브의 꿈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어쩐 일인지 돌아가는 길이 헷갈린다. 끝없이 헤매어 한 시간이나 떠돌고 있다. 버지니아의 것과 같은, 새로 산 레인부츠를 신고 젖은 땅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부츠에 땀이 차서 발에 낀다. 어느새 모르는 거리들로 연결된다. 처음 내리기 시작한 게 비인지 눈인지조차 모르겠다. 무수히 이어지는 가로등의 불빛들... 진로를 바로잡으려 할수록 더욱 엉뚱한 길로 빠져든다.



    가게마다 쇼윈도 안에는 일 년 중 가장 빛나고 예쁜 것들이 가득하다. 어릴 적 조금만 낯선 곳에 떨어져도 나는 쉽사리 길을 잃었다. 길 잃은 아이에게 불빛 영롱한 쇼윈도 안의 인형과 장난감 그리고 케이크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한 도시 안에서도 낯선 거리들은 죄다 이상한 나라들이다.     


    이제 밤의 뒤를 밟아 간다. 어떠한 표지도 없다. 홀연, 대기권 밖의 한 영혼이 어둠을 타고 와 어깨에 내려앉는다. 잃어버린 날개처럼 익숙하다. 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듯 외친다. ‘너는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 깨닫지 못하고 이 삶의 자리를 배회하느냐? 아직도 연극을 계속할 셈이냐?’









    낯선 풍경들의 병풍에 잃은 날개를 걸어놓고 고해성사를 한다. 해감을 토하는 저녁. 아무리 끓여도 열리지 않는 꼬막들. 다시 삼킨 자신의 토사물들. 묵비가 숨긴 기억들. 중첩된 악재의 내력들. 점진적 붕괴.


    어린 시절을 통하여 내가 배운 것은, 불행을 통과한 자에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이다. 사고로 죽을 뻔한 날의 상흔, 불화의 공기가 시시각각 목을 졸라 아이의 말들을 앗아가는 가정, 질시에 부대껴 가학적이 된 친구, 아이의 에너지를 유린하는 검은 손들... 특히 소녀란, 부피감 있게 바삭한 낙엽처럼, 밟아 사그라뜨리고 싶어지는 이름인가 보다. 바라만 보고 말기에는 불안한 보드라움, 그런 형체 앞에서 남자는 사람에서 짐승으로 종種의 변화를 보이는 수가 있다. 이때 그녀와 세상의 보호망 사이는, 무명실과 종이컵으로 연결된 엉성한 송수신 체계에 다름 아니다. 문명 속의 야생은 그렇게 소녀들의 노른자를 도륙해 간다. 나는 혀 밑에 가시를 감춘 채 입을 다문 아이로 늙어갔다. 돌이켜 생각해도 어린 슬픔이란 미화시킬 도리가 없다. 그즈음 무섭고 슬프고 원통한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악몽이 번번이 찾아왔다. 나는 스스로 흘린 식은땀을 이슬비 삼아 자라난 식물이다.


    유년기의 세상은 동의 없이 내 안에 스며들고 침입하고 자리를 점했다. 어린 자아의 적들은 족족 따라다니며 내 발목이 새로 돋아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잘라내 던졌다. 그들은 나를 할퀴고 달아났고 뒤에는 세월과 나만 남겨졌다. 내 신발들은 죄다 길에 잡아먹혔다. 처음엔 차들이 신발을 으스러뜨리고 지나갔으나 곧 흙과 뒤섞인 그 파편들 위로 그냥 무정한 길들이 휙휙 지나 사라져 갔다.








    악마는 도처에서 잠복근무를 섰다. 그중에는 갓 성적 발육이 시작된 여자아이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면담을 요청하여 추행을 일삼는 담임도 있었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이면 그에 대한 목격담이나 풍문을 공유했다. 개중에는 학부모와의 스캔들도 있었다. 그때는 모두가 이런 일들을 그저 쉬쉬했다. 존경받는 교사, 교회 장로, 그리고 네 딸들의 아빠, 나는 세상의 두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는 선하다던가, 모든 열악한 경험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더러운 걸 덮을 마음이라곤 없다.


    앞뒤 전후로 막막했다. 모두가 가담한 것 같은 잔혹극 속에 내가 상의하거나 의지할 존재란 없었다. 학교도 집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 죽고 싶었다. 나는 서럽게 지워지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등잔 밑에 놓인 자신을 마땅히 지워져야 할 존재로 의식하게 되었다. 보호의 외곽지대에 놓여, 내가 읽는 동화책 속에서 야위어갔다. 그때부터 난 세상에 없기 시작했다. 나는 공상 속에서만 살았고 언제까지고 부모와 선생들의 자랑거리로서 대학 가는 그날까지 끝까지 모범생을 연기했다. 나는 타인들과의 연극에서 빗나가지 않은 채로 살았다. 내가 다른 이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역할로부터 완전히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나는 벙어리 배설구로 남았다. 가학-피학의 교묘한 트릭에 정신없이 실뜨기당하며 점점 더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갔다. 다만 나는 겨우 ‘나의 마음’이라는 라벨이 붙은 하나의 쓰레기통이 되었다. 이 쓰레기통은 어느 임계치에서 그만 엎어져 다 토하고 싶었다. 폐기된 여분들의 부당함을 발고하며, 나의 토사물들로 세상 전체가 쓰레기통이 되게 하고 싶었다, 나의 환상 속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생명력의 마술을 믿기도 했었다. 비록 환멸의 폐허로 남았으나 그 속에서나마 시멘트 가루로 만든 꽃이라도 만들어내려 버둥거렸다. 마술은 연달아 꽃도 새도 만들어 튀어 올리니까. 그토록 젊음은 마술이니까.

    원인불명의 협심증을 오래도록 앓았다. 그렇게 괜찮은 척 애쓰던 나날들 끝에 문득 깨닫는다. 나의 자리에 유령이 대신 살고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펑펑 울고 나면 잠시, 방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유령이 다시 내 몸으로 들어와 눕곤 한다는 것을.








    진짜로 크리스마스를 밝혀주는 것은 트리에 달린 색색의 전구도, 갖은 선물들을 탑재하고 세계를 일주하는 산타클로스도, 제일 밝은 루돌프 코도 아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을 가장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밤새 꾼 악몽이다. 선물을 받지 못하고 집 바깥의 광풍 회오리 눈 속에서 밤새 덜덜 떠는 꿈. 길고 섬뜩한 악몽 끝에 다정한 세계로 마음을 여는 스쿠루지의 이야기를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성장 기간 전체가, 깨어나는 것만도 오래 걸리는 악몽이어서 가장 밝은 아침에 눈을 뜨려면 너무도 눈이 부셨다. 눈을 다시 감고 뜨기를 반복하며 다시 모조 악몽으로 빠져들며 보충 잠을 잤다. 꿈꿀 권리만이 남았다. 굵은 선으로 미래를 그릴 권리가 아니라 단지 몽상의 권리, 깬 채로 잠을 잘 권리 말이다. 내 삶이란, 태어난 지는 이리도 오래건만, 빛이 닿지 못하는 희귀병 신생아였다. 나의 유년기에 무덤 모양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어주고프다.





    밟힌 눈이 구두 바닥의 무늬를 기억하겠는가? 무늬란 남들이 보는 것일 뿐, 눈의 심장은 밟힌 만큼 원한의 무게를 품을 것이다. 녹아 진흙에 섞여 사라질 때까지. 악몽을 만드는 배역들, 한때 나를 들락거렸던 이 불청객들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 이름이라는 옷을 상실한 채,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면 채 새벽이 오기도 전에, 저들 그림자의 무게를 유령의 사슬처럼 이리저리 끌고 당기며 옮겨갈 것이다. 이제 무게와 그림자는 더는 내 것이 아니다.    

 

    잠깐 눈이 녹는 동안이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 노래를 불러주는 아침이다. 깨어보니,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시작되는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크리스마스는 자기 생일을 모르거나 잃은 사람들을 위한 축일이다. 영혼 서바이벌 속에 서럽게 지워져가던 이들이 타향에서 이름을 얻는 날이다.


    나는 어느덧 자기 빨래들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빨랫줄 가득 팔다리를 허우적허우적 너울거리던 춤이 멎는다. 미처 개이지 않은 빨래 뭉치는 할 말이 한 다발이다. 다리미를 기다리는 동안 말은 미루고 다만 노래를 부른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사람들이 알맹이를 먹고 버린 귤껍질들은 제 온몸의 수분을 말리며 허공을 비트는 춤을 추었다.     



    한 시간 넘게 떠돌았지만 같은 자리를 맴돈 것은 아니어서 어느덧 포 대학 방향 표지가 보인다. 그것을 기준점으로 귀가한다. 문득 가로등 불빛들이 따스한 색으로 바뀐다. 더 이상 정처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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