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Apr 15. 2024

부디 날 잊지 마!

짧은 만남, 긴 헤어짐



    12월 초, 제니스라는 큰 홀에서는 아르헨티나 탱고 공연이 있었다. 홀은 인파로 가득했지만 무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커튼콜 때 댄서들은 일제히 객석을 향하여 장미들을 던졌다. 나도 앞 통로로 거의 반사적으로 미끄러져 나가 꽃 한 송이를 받아냈다. 로또라도 당첨된 듯했다. 곧 공연 댄서들과의 무도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두 명의 댄서와 춤을 추었다. 이날 밤, 공연 때 받은 장미를 내 방의 빈 포도주병에 꽂아두었다. 장미는 그대로 예쁘게 말라 포를 떠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제 이번 학기는 종강파티와 기말고사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동안 친구들은 각자의 발표를 모두 끝냈다. 그 주제들은 원자력, 파리 교외의 문제, 다이어트, 환경, 실업, 테러리즘, 이민, 집시 문제 등 그럴듯하게 다양했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모든 반에서는 학급 구성원 각자가 자기 나라의 스페시알리테spécialité(고유의 요리)를 만들어와 작은 파티를 연다. 나는 조금 궁리하여 김밥과 전 그리고 수정과를 만들기로 했다. 김밥을 말려면 찰진 쌀이 필요했는데 내가 먹고 있던 타이 자스민 쌀은 향과 맛이 기막히게 좋았지만 점도粘度는 알 수 없어서 김밥은 결국 생략했다. 수정과에는 곶감이 없는 대신 말린 무화과와 말린 대추 등을 넣었다. 









음식을 보자기에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서 숨을 고르고 5분쯤 지나자 나는 실망하기 시작했다. 정작 아이들이 가지고 온 것은 그냥 오이나 당근을 잘라 담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나만 괜히 공을 들였나 싶어 맥이 빠졌다. 게다가 다들 내 작은 호박전조차 나이프로 잘라가며 먹고들 있지 않은가! 나라도 잘 먹자 싶어 접시에 요리들을 담아 먹고 있는데 이런 나를 보고 이시도라가 소리쳤다. “수형, 튀 망주 보쿠!”(수형, 너 많이 먹는 거 아냐!) 








      크리스마스 케익 뷔슈





    아니나 다를까, 주변은 다들 새 모이 주워 먹듯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전과 수정과는 인기가 좋았다. 채식주의자 슈네이드도 내 호박전을 좋아했다. 수정과는 양이 충분해서 지나가던 다른 반 친구들과 마담 카우타르에게 한 컵씩 주었다. 그녀는 수정과를 몹시 맘에 들어 하며 레시피를 알고 싶어 했다. 그 날 밤 나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수정과 만드는 법을 적었다.


 



마리 크리스틴의 집에서 내려다 본






   우리 반 종강 파티는 마리 크리스틴의 집에서 한 차례 더 있었다. 이날은 먼저 레 알(일종의 재래시장)견학을 했다. 우리는 조를 짜 시장을 돌며 프랑스인들의 먹거리들과 크리스마스 음식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시장 상인 중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많아 프랑스인의 먹거리 조사라고 하기엔 좀 그랬다. 거의 형식적인 조사를 마치고는 각자 2유로씩 걷어서 다 같이 장을 보았다. 바게트와 와인, 염소 치즈, 채소와 빵에 바르는 리예트(잘게 다져 기름에 볶은 돼지, 거위 따위의 고기)등을 사서 한 아름 들고 그라몽 1번지 마리 크리스틴의 집 주방에 내려놓았다. 곧 거실의 커다란 장방형 식탁 가득히 접시와 잔들이 놓였고 우리는 즐거이 먹고 마셨다.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다락방처럼 천장이 사선으로 떨어진 집 구조는 행복의 연기가 곧장 굴뚝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처럼 보였다. 창문으로는 곧바로 그라몽 거리의 분수가 내려다보였다. 곧이어 회색 머리의,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시크해져갈 것 같은 선생님 남편도 도착했다. 또 한쪽 구석 의자에는 선생님과 똑같이 생긴 어린 딸 조에도 있었는데 이 소녀는 어쩐지 나를 자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나의 생김새가 서구인들과 달랐기 때문일 거다. 이 거실에서 우리는 다 같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락방처럼 사선으로 떨어진 천장











    기말고사 전날 귀갓길엔 오랜만에 미츠요를 마주쳤다. 그녀의 반은 이미 분반고사를 치렀다고 했다. 미츠요는 웃으며 체념한 듯 말했다. “우리 담임은 모두 상급반에 가게 될 거라고 했지만 나는 예외일 거야.”

     그다음 날 아침, 햇볕 좋은 강의실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시험을 치렀다. 주말을 이용해 미국 시카고에 놀러 갔다 온 버지니아는 시차적응 할 겨를도 없이 앉아 시험에 임했다. 시험 감독으로는 온화한 나탈리가 들어 왔다.


    외국 아이들은 시험을 단숨에 치르고 종료 시간 전에 일찍들 나간다. 그러나 나는 시험에 공을 들이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주변에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시간을 꽉꽉 채워 풀었다. 문법 문제는 검토를 많이 하느라 오히려 탈이 난 것조차 있었다. 이날따라 문제들이 쉽게 여겨졌다. 나 혼자 남아 답안을 완성하자 나탈리가 다가와 즉석 채점을 해주었다. 나탈리는 결과를 만족스러워했다. “아방세(상급반)로 가겠는걸! 아방세로 가고 싶지 않니? 영화랑 문학 수업도 듣고.”


    선생님의 격려에 기분이 부풀어올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강의실을 나와서 사전을 찾아 답을 맞춰보고선 교정을 지나 길들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벌써, 스스로 저지른 실수들이 자꾸만 마음을 콕콕 찔러댔다. 작문은 시작하는 관사부터 틀리게 썼던 것이다.  






    종강하는 날 우리는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인 듯 즐거운 게임을 했다. 

    선생님은 버지니아가 아방세 반으로 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버지니아는 이에 저항했다. 그녀는 도로 중급반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까다로운 문학 수업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나는 자기가 프랑스 떠날 무렵에야 병원 방문 통지서를 받았다고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떠날 시점에 체류증이라니! 


    니코, 미나, 샐리, 코리나, 이 미국 친구들은 곧 떠날 시간이 되었다. 저녁엔 ‘가라주’Garage에 모여 한 잔씩 했다. 또 마지막으로 ‘쇼케이스’에도 몰려갔다. 대학원생들과의 험난한 미션을 함께 했던 니코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내게 말했다. “언제라도 미국에 오면 고양이 13마리와 함께 재워줄 수 있어.” 또 나중에 졸업하여 기자가 되면 한국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느 무블리 파!"Ne m'oublie pas.(부디 날 잊지 말아줘!).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진짜로 떠나갔다. 짧은 만남, 긴 헤어짐이었다.

이전 07화 시트콤 같은 나날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