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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pr 08. 2024

살다보면 기쁜 일이, 그냥 친구가 되는 일



    생의 한 가운데서 나는 죽음 옆방 세입자다. 내가 여기 지상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지, 이는 인생 수업 쉬는 시간마다 담배 태우듯 빼먹지 않는 질문이다. 세월이 나를 허물어뜨리기 전에 또 다른 하나의 삶이 가능해져야 했다. 그래서 햇빛의 충전이 필요했다. ‘포Pau’라는 결계 안, 나는 다른 시간을 걷는다. 


    지하 문명을 다룬 어떤 책에서, 지구 속엔 또 하나의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있어 키가 엄청나게 큰 인류가 살며 지하 나름의 또 하나의 태양이 뜬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인 태양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지구라는 같은 땅덩어리 위에서조차 바라보는 위치마다 하늘이 다르고 태양도 같지가 않다. 물리법칙으로는 채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눈이 내리기 직전까지는 일조량은 언제고 충분했다. 특히 아침마다 학교 가던 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고 싶을 지경이다. ‘늑대 세탁소’(라브리 뒤 루 Laverie du Loup라는 세탁소를 내 나름 이렇게 부르곤 했다)를 지나면 나오는 주택가를 따라, 힐난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으며 단지 ‘부축해주고 격려해주는’ 햇빛을 받으며 걷노라면 더러 학교 친구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새들과 꽃들, 한적한 일상 풍경들은 ‘기쁘게 등교할 신나는 시간이에요.’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때 등줄기에서 어두운 꿈이 자라지 못하도록 늘 목덜미를 데워주던 햇빛을 생각하면 어떤 우울에 빠졌다가도 ‘다시 한 번만 그 도시에 가서 그 길을 걸어보자, 그럼 힘이 날 거야.’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여전히 내게 빛은 눈부셔서 응달이 더 익숙하지만 어느새 햇빛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이곳 사람들의 가시 돋치지 않은 일상의 공기에 실려 무심코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계절 따라 다른 빛깔의 꽃을 피워 올리는 담벼락들, 볕 좋은 베란다에 올라앉거나 잘 데워진 땅바닥에 뒹구는 고양이들에 정신을 파는 동안 포의 햇빛이 사르르 미세한 레이저로 내 심장을 성형하고 있는 줄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였다. 









    햇빛의 도시에서 그 길을 걷다 만나는 친구들은 벌써 아스라해져 가는 이름들과 더불어 시간의 틈으로 들어가 버려, 사는 동안 그들을 얼마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두 방울 우정의 수혈이면 내겐 충분하다. 작은 바늘 하나가 옷 한 벌을 몽땅 꿰매듯, 한 방울의 잉크가 큰 컵에 담긴 물의 색을 바꾸듯. 굳이 흉금을 다 터놓고 서로의 영혼이 전기 맞은 듯 강렬한 교감으로 충만할 필요까지도 없다. 거듭되는 작은 미소와 포옹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힌트다. 


    사람은 정말이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라면 별의별 것을 다 하는 동물이다. 이 무의미에 대한 공포가 삶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미래에는 ‘언젠가는 확실히 고인이 된다.’는 것 말고는 보장된 타이틀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꽃 심고 나무 심고 해 보았자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를 묻는 존재들인 것이다. 


    특히나 명왕성의 영향권에 대단히 노출되었던 이 무렵에는 전 세계적 저명인사들의 사망이 많았던 데다 심지어 내 주변의 새파랗게 젊은 친구 둘이나 병으로 세상을 떴다. 지상에 잠시 맴돌던 그들의 발랄했던 웃음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온라인으로 소식을 듣고는 삶의 임시성에 잠시 전율이 일었다. 


    그래서 살다 보면 기쁜 일이, 그냥 친구가 되는 일이다. 매번 살아 있음을 느끼게끔 서로 안아주는, 아무런 단서도 조건도 없는 그냥 친구. 이런 일은 우리가 어릴 때 처음 친구라는 이름을 만들 때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점차 드물게 되어 최근에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났었나 헤아려 보게 된다. 나는 어린 왕자가 말한 ‘친구를 파는 가게’라는 곳을 가보거나 그런 데가 영 없다면 내가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은 적이 있다. 



    고양이가 무작정 털실에 이끌리듯 인연이 끄는 대로 내가 우연찮게 들어간 곳, 그곳의 겉껍데기는 포 대학 부설 어학원이었으나 그 속살은 남서 피레네의 ‘우애의 학교’였다. 이곳의 학생증은 계좌 만들고 충전해서 학식을 사 먹거나 자판기에서 라테를 뽑아 마시고 도서관 책 몇 권 빌리는 게 고작인 정도의 용도다. 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란, 누가 몇 살이건 기혼자건 이혼자건 자기 나라에서의 사회 약력이 어떻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요람에 다시 태어남을 증명해주는 출생증이다. 그 간략한 증서와 더불어 기숙사에 놓을 담소한 짐꾸러미 정도면 의외로 쉽게 타향의 식객이 될 수 있는 줄은 처음 연수를 준비할 무렵에는 알지 못했다.



    힐링이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업데이트되는 거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왕이면 일상을 아울러 여럿이 참여하는 세팅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배역이다. 이 세팅에는 의외로 단역들의 비중이 크다. 일상 속에 그리 티 나지 않게 지속적으로 조금씩 서로에게 관여하며 은은한 아우라로 공간을 끈기 있게 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두셋의 긴밀한 우정에 덧붙여, 집을 나와 사방 어디로 걸은들 누군가와는 마주치기로 되어 있는 이 작은 커뮤니티 속에선 외로울 겨를조차 없다. 비단 학교 친구들뿐 아니라 포의 시민들 전체가 훈훈한 익명의 엑스트라를 이룬다. 필요한 간격 속에 살다가, 어떤 지지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알아보고 손을 뻗어준다. 한 길 가, 우체국, 버스 속, 어디나 그러하다. 익명의 타인에 대해 ‘저놈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라는 경계를 지레 품고 사는 공기에선 상상하기 힘든 풍습이다. 나탈리 선생님은 여기 남부 사람들의 기질에 대하여 ‘샬뢰흐chaleureux(따듯한)’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단어의 어감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타인을 환대하는 온기의 사람들, 태양은 포에 분점을 차린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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