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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pr 01. 2024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잼가게, 프란시스 미오



    프랑스는 내게 꿈으로의 단축키다. 단번에 내가 살던 화면 바깥으로 놓여나게 하는. 이 달콤한 현실도피. 이 숨겨진 키에 의해, 늘쩍늘쩍 붙들리던 내 두 발은 허공을 디뎌 오르고 이러다보면 나는 펜이라는 작은 자전거에 달린 싱싱 페달을 밟으며 하늘로 오른다. 


    남의 나라 왕의 도시에 내가 무슨 별다른 감회를 품겠나 싶지만 여행은 생애들을 걸쳐 지나쳐온 것들 즉 지난 세기의 나를 다시 방문하는 행로다. 못다 맞춘 조각을 찾아 점차 완성되는 그림을 보기 위함이다. 

    결핍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이번 삶에선 조각들을 주워 맞추고, 다음 삶에선 오로지 살리라. 이 넝마주의 일생, 남루한 곡예, 허공을 찌르는 외뿔이여! 내 흐릿한 젊음에 대한 속죄가 필요했다. 그 추억으로 이제는 박제를 하나 지어 깃털을 가다듬어 어루만지려 하나 이 추억은 박제가 되지는 않는다.


    갈망의 어망을 털면 아흔아홉의 햇빛 조각이 쏟아진다. 시간의 화장터에서, 유물 관리소에서 복무 중이었다. 잠시 꽃을 가꾸는 시간, 잿가루가 꽃가루처럼 나른다. 어제가 모레에게 남긴 유서를 또박또박 읽는 동안 아침 닭이 울어 우린 베드로 가면을 쓰고 시든 꽃을 치우러 간다. 잿더미 속의 사리를 건져 올려 받쳐 든다. 묻은 재를 털어 주머니에 넣는다. 이 일을 거듭했다. 사리는 어둠 속에 있다. 저절로 반짝이는 것들을 다만 받아 적는다.


    겨울 그늘에 겨드랑이를 드러낸 나무들. 겨울 시간. 겨울은 이렇게 불림직도 하다. 맨살은 물론 맨뼈까지를 보이니 진정 시간이다. 감각의 노정에서 겨울은 런웨이 끝이다. 시선과 실루엣들은 극極을 한 번 찍은 다음 옆모습을 보이며 전환한다. 추울수록 창궐하는 감각의 제국. 겨울은 발걸음을 거두고 우뚝 선 대신, 그 안에선 그냥 있는 지점이 다 여행이고 입김이다. 한 발짝만 내디뎌도 눈 위에는 기다리던 무한이 ‘뚱'하고 찍힌다.







    그리고 나는 겨울의 입김을 가로질러 미각이라는 추억의 나라를 방문한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 특히 여기 남서쪽은 미식가의 천국이다. 세프cèpe(그물버섯 종류)나 트뤼프truffe(송로버섯)을 넣은 오믈렛, 염소젖 치즈,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흔히 보이는 오리들의 사육으로 얻어지는 푸아그라와 콩피 드 카나르confit de canard(염장 오리다리), 오리와 야채들을 넣고 푹 끓여낸 가르뷔르garvure, 앙리 4세가 전 국민이 일요일에 한 번씩은 식탁에 올리길 바랐다던 풀 오 포poule au pot(야채와 각종 허브를 넣고 푹 끓여낸 닭요리, 크리스마스 특별요리), 바욘느의 장봉, 보르도의 저명한 와인, 비아리츠의 초콜릿 등. 또 디저트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나조차 무릎을 꿇게 만드는,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잼과 초콜릿 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미오Francis Miot’가게의 스리즈 누아르cerise noire(검은 체리잼)과 쿠쿠네트coucougnette(프란시스 미오가 아몬드와 사탕가루로 만든 당과)들이란! 





프랑시스 미오 가게




프랑시스 미오 가게 내부






태어나 먹어본 중 가장 맛났던 잼





    그러나 이 모든 현란한 맛에 앞서 딱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치 않고 그 왕좌에 크루아상을 앉힐 것이다. 그 향미와 생김새는 가장 프랑스를 닮아 보인다. 요란하게 튀기보다는 균형 있게 소담하며 결이 섬세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영화 수업은 두 시간의 영화 관람과 두 시간의 토론으로 이어진 긴 마라톤이었으므로 선생님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점심을 먹도록 했는데 이때마다 등굣길에 크루아상 몇 개를 사 가곤 했다. 내 일상적인 크루아상은 유서 깊은 빵집 생폴이 공급원이었다. 필경 그중 한 개는 학교에 도착하기 전 입안으로 사라진다. 양쪽 귀를 돌돌 접은 빵 봉지에서 갓 꺼내 눅눅해질세라 미리 까먹는 도시락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귀갓길에 다시 들러 간식거리로 자주 사던 ‘플루트’flûte도 잊을 수 없다. 이것은 검은 깨가 점점이 박힌 가느다란 바게트인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마치 인절미 같다. 



맛난 크루아상과 바게트를 팔던 생뽈 빵집




    신기한 것은, 이런 새로운 맛들뿐 아니라 조리법이 익숙한 한식조차도 여기서는 다른 맛이 났다. 내 요리 솜씨가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닌데 여기서 만들어놓으면 이상하게 모든 게 맛있었다. 그때마다 이 프랑스라는 나라에는 재료나 조리법 이상으로 뭐든 맛나게 만드는 기운이 감돈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믹스커피를 타 마셔도 더 오묘하고 달콤하다. 이건 공기다. 잡다한 맛들을 중화시키는 부드럽고 건조한 공기, 그게 천연 조미료인 셈이다. 


    음식만 그러할까? 여기는 살아 있는 시시각각, 순간에 대한 미묘한 탐닉을 부르는 공기가 있다. 이 공기는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찰나에 마음을 내주며 사는 이들에게만 향유되는 어떤 것이다. 

    어디선가 귤빛 사탕 냄새가 난다. 머지않아 섬세한 사람들의 세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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