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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Mar 28. 2024

피레네에서 바람을 멈추다



    11월 하순, 날씨는 제법 쌀쌀해져 곧 겨울이 될 것이었지만 햇빛은 저장량이 얼마든지 있다는듯 쏟아졌다. 심지어 여기는 12월이 되어도 20도 정도에 볕이 쨍쨍하고 크리스마스 전후해서만 조금 추울 뿐이다. 그래도 저녁이나 새벽이면 난방이 필요했는데 라디에이터 작동법을 몰라 오래도록 멍청하게도 추운 채로 지내기도 했다. 어느 날 성진 씨에게 물었더니 기숙사에서 꽤 살았던 그는 어이없어하며 외쳤다. “오랄라! 이미 난방되고 있을 텐데요!”

    어쩌다 우연히 밸브를 끝까지 돌려봤더니 난방이 되었다. 그때부터 몹시 따뜻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맘때에 이르도록 내가 아직 해 보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피레네 등반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피레네 등반, 보드나 스키 타기는 여기서 누려야 할 필수 목록으로 되어 있다. 주변 친구들은 심심찮게 주말을 이용하여 가장 좋은 시즌에 피레네에 다녀오곤 했다. 그 사이에 피레네의 나무들은 잎들을 모두 떨구어 버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아쉬움이 몰려왔다. 







    어느 날 슈네이드네 들렀다가, 막 샤워하고 나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슈네이드와 마주쳤다. 슈네이드는 날 기쁘게 안으며 이날 처음으로 피레네 등반을 마치고 난 참이라고 했다. 학교 등반클럽에 25유로를 내고 등록하면 매번 갈 때마다 10유로씩만 내고 등반할 수 있다고 했다. 등산화도 빌려준다는 거였다. 산세는 오르락내리락 험하지만 가이드하는 사람도 재미있었다고, 꼭 가보라고 했다. 


    당장 그다음 주에 스포츠클럽을 찾아가 등록했다. 산행을 위하여 등산용 스틱과 보온병을 준비했다. 스틱이니 등산화니 덕다운 점퍼 등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출발할 때 다 가져온 것들이었다. 오로지 이날을 기다려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보온병을 사기 위해 마트에 갔지만 정작 보온병을 무어라 부르는지 몰라 직원을 붙들고, 물의 온도를 유지하는 병, 이렇게 빙 에둘러 설명했더니 그는 한 마디로 그것을 thermo떼르모라 부른다며 매대 위치를 알려주었다. 역시나 너무 좋지도 후지지도 않은 것을 골랐다. 출발 전야에는 심혈을 기울여 첫 피크닉에 합당할 샌드위치를 빚어냈다. 냉장고 안의 모든 재료를 동원하여, 달걀과 감자를 삶아 으깨고 다시 다른 야채 볶은 것과 소스를 넣어 버무리고 빵에 발라 거대한 샌드위치를 완성했고 그것은 죄악에 가깝게 맛있었다. 






    휴일 아침 장밋빛 여명이 물드는 새벽 거리를 가로질러 조금 추워하면서 걷는 것은 꽤 운치 있었다. 집합장소는 학교 뒤편의 스포츠 센터 앞. 거기에는 초급반의 베네수엘라 소녀 누비아, 북미 아이스하키 선수인 혈색 좋고 단단한 체격의 토니, 그리고 소년 같은 독일 교환학생 안나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레네까지는 통상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피레네 대로에서 늘 멀리 실루엣으로만 보던 피레네는 다가가 그 안에 들어서자 웅대하고도 미려한 가슴을 열어 보여주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많은 산을 보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이 산만큼은 어쩐지 저절로 의인화가 된다. 이 산은 거대하고 아름답고 신령하다. 아무리 여행이란 것이 내 것이 아닌 풍경들을 잠시 빌리는 것이라 해도, 아, 여기만큼은, 피레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죽기 전에 와 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수려한 경개를 배경으로 언뜻언뜻 눈에 띄는 소, 말, 양 등에 감탄하자마자 차는 산 중턱에 선다. 해발 3000이 넘으므로 피레네는 당일 코스로 만만하게 오르내리기에는 너무 높아 중턱까진 차를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가이드는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오르고 이를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가이드 베르나르는 이따금 그의 커다란 카메라로 산수경개며 사람들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잘도 포착하여 찍어놓은 다음 나중에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는 커다란 렌즈를 항상 니트 스웨터 조각 같은 것으로 잘 감싸고 다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유쾌한 베르나르는 산에서만 할 수 있는 이런저런 놀이들로 우리를 이끌어 들인다. 그가 높은 비탈을 내려가다가 문득 언덕에서 돌을 튕겨 보이면 다들 따라했다. 그러다가 누구의 돌이 멀리 가나를 겨루며 놀았다.




같이 산행한 토니와 누비아




    가장 어린 누비아는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아 엄살을 부렸다.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는, 비행기가 날아와 자기를 태워갔으면 좋겠다고 외쳐댔다. 그녀는 숙모 댁에 묵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등반 온 거였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 오블리가투아르.”C'est obligatoire.(의무적이에요.)였던 것이다. 이런 누비아를 제외하면 모두 씩씩하게 산을 올랐다. 힘들뿐더러 춥고 황량하기까지 했다. 산꼭대기 인근에는 양인지 염소인지 모를 동물들의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베르나르는 그것들이 실족사를 한 동물들의 잔해라고 했다. 그는 산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산꼭대기에서는 만년설을 얹은 웅대한 장관을 배경으로 베르나르의 지리 사회학 강의가 종종 곁들여지곤 했다. 저쪽은 페이 바스크고 이쪽은 스페인이고 저쪽 산에는 곰이 살고 있고 등등. 피레네는 스페인, 프랑스, 바스크, 안도라 등 여러 나라의 국경을 나누고 있다.


    점심은 바람 많은 풀밭 위에서 먹었다. 풀밭이라고 해서 낭만적이기에는 거기는 순전히 똥 천지였다. 짐승의 똥을 완전히 피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만큼, 똥을 피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묵인했다는 말이 더 맞을 지경이었다. 나는 엉덩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빵을 먹었다. 그 와중에 믹스 커피를 타서 주변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내려올 때는 매나 독수리처럼 생긴 새들이 멋들어지게 날고 있었다. 그것들은 카메라에 담을라치면 약을 올리듯 시계를 벗어나 날곤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오랜 산행으로 녹초가 되어 나른하게 쓰러져 있었다. 차 유리를 비추는 마지막 햇빛이 노곤한 세포에 스며들었다. 햇살에 녹아 젖는다. 바람 없는 하늘, 새가 난다.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하다.    




            

선회     



새들이

제 몸의 굴곡 모르듯

우리 자신 

영혼의 곡절 알지 못해 

끊임없이 제 꼬리 혹은

남의 꼬리 보고 돈다    

 

잊지 말기를 

영원만이 나를 고용했음을

나는 제 깃털을 부리로 뽑아 

비단을 짜는 학이 되었다   

  

우린 피자마자 지는 꽃들이다

만추, 생존에 목도리를 두를 시간이다

쓸모로부터 내가 되는 저물녘

거친 영혼 위해 기도하리라   

  

그리고 말없는 사물들

이제 내가 답할 시간이다

유령된 눈으로 세상을 본다     

낙엽도 단풍도 김장을 담지 않는다       





   

    겨울방학 직전 베르 라로Vers Larau라는 곳으로 한 번 더 산행을 했는데 이때가 처음보다 몇 배는 더 좋았다. 도착하자마자 계곡물 소리가 말할 수 없이 청량했으며 오름새가 가파르지 않은 데다 길의 모양새는 변화무쌍했다. 수종도 다양했으며, 어딘가는 도토리들이나 낙엽들이 수북이 깔려 있는가하면 어떤 길에는 약간의 눈이 쌓여 있어 눈싸움까지도 할 수 있었다. 








수많은 버섯들 중 식용인지 독성인지는 약국에서 판별해준다고 한다.






    줄곧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길을 지나던 중 왠지 진기해 뵈는 버섯 덩어리들마저 눈에 띄었다. 나무에 붙어 있는 딱딱한 버섯은 분리하기 쉽지 않았으나 케이가 달려들어 주머니칼로 떼어내고야 말았다. 베르나르에게 보여주니 ‘랑그 뒤 뵈프'(’소의 혀‘라는 이름의 버섯)일 거라고 했다. 여기 사람들이 즐겨 먹지는 않지만 식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야생이니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이것의 순진한 생김새를 믿었고, 실제 이것을 끓인 물은 향기롭고도 기름졌다. 모양새만큼은 영락없이 상황 아니면 영지였다. 


    또 여기는 꽤 높은 고도에 아찔한 흔들다리가 달려있어 다들 여기서 사진을 찍고 일부러 다리를 흔들어 장난도 쳤다. 이곳은 지난 학기 초, 책 축제 때 샀던 책 <피레네의 전설>에 나오는, 80미터 높이에 강철 케이블로 만들어진 바로 그 다리다. 책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우리는 이윽고 산꼭대기 언덕 우뚝한 풀밭에 걸터앉아 형언할 수 없는 경관을 마주한 채 샌드위치를 뜯기 시작했다. 또 어디선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주었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 아니 천국에서의 피크닉이라 할만했다. 












    하행길에서는 바람이 세찬 나머지 나 같은 것은 불려 날아갈 지경이었다. 너무나 거센 바람 속에서 나는 장난처럼 소리쳤다. “바람의 신神아, 잠시만 나를 위해 바람을 멈춰다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연인 듯 마법인 듯 바람이 신기하게도 딱 멈추었다. 마침 그로부터 며칠 지나 기말 분반고사가 있었는데 마침 작문 주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이상야릇한extraordinaire 경험에 대해 쓰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나는 피레네에서의 ‘바람의 신’ 사건을 써내려 갔다. 초자연적 경험이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느니 어쩌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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