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Mar 25. 2024

학기말의 부조리극




    낙엽이 한참 떨어지는 가을의 절정에서, 아직 겨울의 한기는 그닥 스며들지 않은 아름다운 11월 중순,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 돌 의자에 샐리가 자주 보였다.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젊은 언니 분위기의 마리나는 샐리에게 무엇을 뜰 거냐고 물었다. 

    “바로 저런 거요.” 샐리는 내가 하고 있던 발 토시를 가리켰다. 

    “아 그것은 장비에르(레그 워머)라고 하는 거야.” 마리나가 가르쳐 주었다. 이 무렵 나는 앵글 부츠 위에 무릎 아래까지 발 토시를 덮어 다리를 감싸고 다녔는데 이 패션을 샐리와 여자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발 토시는 유용했다. 유학 생활에서의 짐의 부피와 무게를 고려하면 어그 부츠나 장화보다 실용적이었다. 




샐리가 뜨개질하던 가을 교정




    샐리. 학기 초부터 샐리는 내 눈을 끌었다. 은은한 그녀의 패션 감각은 튀지 않는 대신 섬세한 포인트가 돋보였다. 그녀는 짧은 커트에 안경을 써서 어딘가 할머니나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이런 외양으로도 멋 부리는 요령은 다양했다. 치마는 입지 않은 대신 구두에 대한 애착은 티가 났다. 아이보리 빛 웃옷 가슴 부위의 고른 펀칭무늬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안에 받쳐 입은 라벤다 빛깔은 유니크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따금 머리에 금빛 나는 긴 천으로 헤어밴드를 해서 뒤 끈을 목덜미로 늘어뜨리거나 짧은 머리를 수많은 실핀으로 스타일링을 하거나 했는데 그녀가 그런 모습일 때마다, 예쁜 거를 좋아하는 나는 절로 눈이 갔다. 그녀는 손재주가 좋은지 가끔 매듭을 엮어 머리띠 같은 것들을 만들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수업 시간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성적이어 보였다. 우리 반에서는 시키지 않아도 늘 나서서 말하는 아이로 케이트와 코리나가 있었고, 시키면 무척 잘 말하는 부류로는 이시도라와 미나가 있었다. 시키면 절제된 정확한 표현을 하는 니코, 그리고 시켜도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샐리와 슈네이드, 어눌한 듯 말하는 조쉬, 비록 출석률은 저조하지만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저 않고 별별 농담까지 다 섞어 말하는 버지니아, 새침한 듯 최소한의 말만 하는 킴벌리, 우리 반 아이들의 자기표현 양상은 이러했다. 


    그럼 나는? 시키면 뭐라도 말하려 애썼기 때문에 선생님 눈에 그리 소극적인 학생만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원하는 만큼의 말의 조합이 만족할 만큼 만들어지지 않아 늘 전전긍긍 고달팠다. 마리 크리스틴은 니코와 샐리, 킴 등 소극적인 학생들에게는 말을 하도록 권유되는 분위기 자체가 다소 브뤼탈brutal(잔인한) 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샐리, 그녀는 수업 자체를 좀 지루하게 여기는 아웃사이더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키보드나 색스폰, 플롯, 기타, 드럼 등 악기 한두 가지씩은 다룰 줄 알았는데, 샐리도 기타 치며 노래하길 좋아했다. 고향 라스베가스의 동네 바에서 때때로 오픈마이크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 샐리가 한 번은 작은 말썽을 부린 적이 있다. 라파엘 선생님의 수업에서였다. 이 수업을 아이들은 가면 갈수록 지겨워했다. 초반의 ‘장님 놀이’를 비롯한 각종 놀이들과 힘든 발음 연습까지는 그럭저럭 따라갔는데, 학기 말 가까이 선생님의 야심 찬 프로젝트가 공표되면서 학생들의 불만들이 불거져 나오고야 말았다. 선생님은 학기 맨 마지막 날엔 동료 선생님들 몇 분을 모셔놓고서 우리가 연극적인 한 장면을 시연해 보이자고 했다. 우리들이 싫다면 굳이 안 해도 된다고 단서를 붙였지만 얌전한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나서서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애매한 동의는 곧 불만의 릴레이로 이어지고 말았다. 





포의 가을숲






    선생님이 택한 대본은 장 타르디외Jean Tardieu의 실험적인 희곡이었다. 그것은 «언어의 희극» 시리즈 중 무슨 신포니에타라는 작품이었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악기 대신 사람들의 목소리로 만드는 소규모 교향곡이었다. 베이스와 메조, 소프라노와 테너 등 각 목소리 톤들이 악기를 대신해 차례차례 등장하여 어우러지면서 장엄한 합창으로 끝나는 구성이었다. 


    이제 매주 두 시간 수업 중 후반부 한 시간씩은 학기 말 시연을 위한 연습에 바쳐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을 듯도 싶었던 이 연습은 지루했고 기괴했기에 다들 곧 바보 같은 짓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제 결석쟁이 버지니아뿐 아니라 다른 애들도 슬슬 이 수업을 땡땡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앞의 한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샐리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며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샐리를 찾아냈다. 샐리는 어딘가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성의 때문이었는지 샐리는 이때부터 작업에 별 투정 없이 동참했다. 



    그러나 문제의 시연 날이 되자, 대본 앞부분 ‘메담 메슈, 봉주르, 주 부 프레장트....’로 시작하여 오케스트라 전체를 소개하는 사회자 역할을 하기로 했던 버지니아가 예고 없이 결석을 해버렸다. 시카고에 놀러 갔다 제때 돌아오지를 않은 것이다. 급한 대로 책임감 강한 니코가 자원하여 그럭저럭 마칠 수는 있었다. 

    엉겁결에 불려와 앉혀진 몇몇 선생님 중에는 이 어학원 유일의 문학 전공자인, 무려 소르본 출신의 젊은 카롤린도 있었는데 그녀의 동그랗게 벌어진 눈빛은 ‘이 희한한 구경거리는 다 뭐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딱히 감탄의 눈빛은 아니었다.

    왠지 다른 관객이나 우리 시연자들보다는 라파엘 선생님 자신을 더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던 듯한 이 극은 이렇게 학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전 01화 그렇게 해서 칠면조는 다 날아갔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