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람이 험하게 분다. 내가 사는 건물은 지형적 특성에 의해 마치 ‘폭풍의 언덕’ 같은 바람소리의 향연에 놓인다. 지금은 겨울 오후 햇살이 희끔한 늑골을 들었다 내리는 순간이다. 블랙홀을 살짝 미끄러져 가려던 추억 중 하나를 겨우 붙들어다가 기억의 선반에 다시 앉힌다.
지금쯤이면 포의 겨울은, 만만찮게 스며드는 추운 날씨에 첫눈 한 번쯤 내렸을 거다. 거기는 눈이 잘 쌓이도록 내리지도 않을뿐더러 채 하루를 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 찰나가 더 애틋한 축복이다. 포의 눈 내린 풍경은 참 예뻐서 ‘눈 내리는 초록’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흰 가루 밑에 여전히 푸른 잎과 붉은 열매를 단 상록수들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를 예고하고, 눈 내린 길을 걸어가면 사탕가루나 가벼운 크림을 얹은 케이크를 핥는 기분이다.
12월 둘째 주부터 크리스마스 주간으로 돌입하면 도심의 모든 상점은 저녁 늦게까지 문을 연다. 평소 저녁 7시 이후에는 거리가 완전히 썰렁해지던 일상과는 대비되는 축제의 기간이다. 피레네 대로로 가기 전 광장인 플라스 드 클레망소를 비롯한 너른 장소에서는 매일매일, 베아른(Béarn 18세기 중엽 스페인에 인접한 프랑스의 옛 지방 이름. 포 주민들은 종종 자기 마을을 베아른이라 부른다)이나 페이 바스크Pays Basque지역의 독특한 노래와 춤, 합창, 연주, 아이들을 위한 눈썰매장과 눈싸움 행사, 연극, 인형극 등이 이어진다.
클레망소 광장에는 마르셰 드 노엘Marché de Noël(크리스마스 시장)이 죽 늘어서 이 지역 장인들의 핸드 크래프트 소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손난로라던가 실로 짠 장갑, 실크와 울을 한 올 한 올 엮어 만든 근사한 머플러와 독특한 디자인의 모자, 펠트 소재의 ‘미텐느’Mitaine(손가락 끝부분이 밖으로 나오는 여자용 장갑)라고 불리는 손 토시 등 평소에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바스크 지역의 춤
임시로 동물 우리도 마련되어 아이들이 새끼 양을 안아보기도 한다. 인근 축산 농가의 질 좋은 고기들이 판매되는가 하면 가르뷔르에 고기 요리, 바게트, 뱅 쇼와 애플파이, 치즈로 구성된 세트 메뉴가 10유로 남짓의 싼값에 제공되기도 한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시내에 나가 크레페를 뜯어먹고 뱅 쇼 한 잔으로 몸과 마음을 녹이며 거닐면 세상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상태가 된다.
10유로에 제공되는 세트. 가르뷔르, 고기 요리, 바게트, 뱅 쇼, 애플파이, 치즈
드디어 한가한 겨울 방학이 왔다. 다들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나거나 해서 남아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시내 축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이미 크리스마스 축제 캘린더를 보고 달력에 무수한 구경거리들을 표시해놓은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1000개의 달걀로 만드는 오믈렛이라니! 법원 앞 공터에서는 두 차례, ‘프라이팬의 친구들’(Lous Amics de la padère)이라는 동호회가 주최하는 초대형 음식 만들기 이벤트가 열렸다. ‘1000개의 달걀로 만든 오믈렛’이라던가 ‘초대형 가르뷔르’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1000인분의 비빔밥이나 떡국 만들기 같은 것이다. 이런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를 나섰다가 옆의 시식자와 친구가 되는 일도 있었다.
1000인분 가르뷔르
커다란 천막 안에는 거인이 사용할 것만 같은 대형 프라이팬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윽고 눈앞에서 1000개의 달걀들이 하염없이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큰 통 안에 천 개의 눈알처럼 동동 떠 있었다. 이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베이컨과 밤을 써는 과정이 한참 남아 있었고 나 외에 구경꾼이 딱히 없었으므로 근처 골목들을 두 바퀴쯤 더 돌고 다시 갔다. 마침 요리는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몇몇 시식 대기자들이 또 있었다.
오믈렛이라고는 하지만 천 개의 달걀이란 한 번에 뒤집어질만한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달걀 볶음 형태였다. 베이컨, 밤 등이 들어가는 건 이 지역의 레시피라고 한다. 곧 기다린 시식이 이루어졌는데 말이 시식이지 그냥 배부른 식사였다. 몇 접시고 맘껏 먹을 수 있었지만 한 접시만 먹어도 배가 불러 두 접시가 한계점이었다. 달걀, 베이컨, 밤..., 이 고칼로리, 내 살들의 주범이 되었으리라.
1000인분 오믈렛을 준비하는 프라이팬의 친구들 동호회 분들
좋아라 먹는데 문득 내 옆에서 시식하던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먼저 나의 국적을 물었다. 사실 어딜 가나 누굴 처음 만나도 나의 국적을 물어오고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바탕 위에 대화가 전개되었기에 나는 유학 내내 우리 나라의 정체성 문제에 온통 진지해져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순간순간 나의 편의에 따라 사대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포지션을 오가며 한 마리 박쥐로서 프랑스 하늘 아래 머물렀다.
그녀는 국적과 신상을 묻다가 내 나이를 듣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엉크루아야블르! 주 느 프 파 크루아르.Uncroyable! Je ne peux pas croire.”(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그러면서 아시아인들은 중년이 되어도 얼굴에 청소년일 때의 자취가 많이 남더라며 옛 펜팔 상대인 동양 친구 이야기로 넘어갔고 곧 또 자기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녀는 높은 톤으로 활달하게 떠들었다. 그녀는 한 접시를 더 먹고는 이제 집에 가서 디저트로 과일만 먹으면 저녁식사가 되는 셈이라고 좋아했다. 헤어질 무렵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 제트 트레 셍파. 부 제트 트레 우베르트.Vous êtes très sympa. Vous êtes très ouverte.”(당신 정말 맘에 들어, 당신은 참 개방적이야)
그녀는 또 만나자고 했다.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당장에라도 연락할 기세였다. 그녀는 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살았고 영어 선생님인데 여가 시간이 많다고 했다. 이름도 영어식인 ‘제니’였다.
나도 얼떨결에 많이 떠들고 헤어졌다. 누군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기분은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자아를 쉽게 이완시켜 주었다. 이것이 제니와의 첫 만남이었고 가장 좋은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