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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May 13. 2024

“프랑스 대학의 강의란 게 다 그렇지 뭐.”




    학기가 끝나는 3월에는 델프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이를 염두에 두고 특히 우리들의 전반적인 청취력 향상을 위해 추가로 쿠르 돕시옹cour d'option(선택 교양수업)을 들을 것을 권장했다. 이것은 여기 대학의 문학이나 인류학 등의 강의를 택하여 최소한 8번 이상 출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요구가 의무인지 단지 권유인지 헷갈려서 우리들 사이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모든 수업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강조했는데 그 권유가 밀레나, 자닌에 이어 미리암에 이르자 결국 영국 친구 폴리가 물어보았다. “세 오블리가투아르?”(의무적인 건가요?) 


    이 겨울 특히 빨강 체크 모직바지를 즐겨 입던 미리암은 그 산타클로스처럼 둥근 눈을 폴 리에게 뚫어지게 고정시키고 천천히 말했다. “위, 세 오블리가투아르. 쉬르투 투아 폴리, 튀 두아 트라바이에!”(그래, 의무적이야. 특히 폴리, 너는 공부해야 해.) 


    미리암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폴리가 게으르거나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아니었다. 폴리는 첫 학기부터 상급반이었다. 단지 반에 영국 친구들이 별로 없어서 수업에 들어오기 심심해하는 눈치였다. 폴리, 학기 초반에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허물없이 웃어주었는데 물고기를 닮은 눈, 이지적인 뿔테안경, 굵게 컬이 진 브라운 톤의 긴 머리, 영국인 특유의 어떤 느낌 때문에 나는 그녀를 속으로 ‘여자 비틀즈’라 생각했다. 영국인들은 앞머리로 이마만 가려도 비틀즈처럼 보였다. 


    이 학기에 영국 애들은 폴리, 릴리, 알렉스, 크리스 이렇게 넷밖에 없었다. 이들은 학기가 시작하고도 조금씩 늦게 등장해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돌아가면서 결석했다. 학기 초반에 선생님들의 경향을 파악한 다음 눈치를 봐가며 최소한만을 출석했는데 인기 없는 수업의 경우 영국 아이들은 통째로 결석했다. 수업이 끝나면 이들은 건물 밖 정원에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논의하곤 했다. 그 내용이란 주로 그 저녁 어느 바에 모여 놀까에 대한 궁리였다. 그 무리 속에 슈네이드도 종종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수업이면 알렉스가 주독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얼굴로 릴리에게 묻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너 괜찮아?”


    그들은 저녁에는 파티, 낮에는 술 깨는 음료와 함께했다. 수업 중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레드불이 놓여 있곤 했는데 어느 날 밀레나는 그 음료의 성분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지적했다. 알렉스는 캔을 들어 성분을 읽어보더니 경악했다. 그것은 순 설탕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술 깨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할 거다. 


    잦은 결석에도 불구하고 영국 친구들은 프랑스어를 이미 우리나라 대학원 수준 이상으로 잘했다. 얘들은 모교에서 프랑스어 공부를 강도 높은 훈련처럼 해 온 나머지 공부에 질려 있었다. 이 리즈라는 대학에서는 심지어 아이들이 포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기간에도 호시탐탐 과제를 부과해서, 일주일밖에 안 되는 중간방학에도 1000단어 정도의 에세이를 프랑스어로 써내게 하곤 했다.


 

    다시 교양수업 문제로 돌아와 보면, 처음에는 다소 모호한 제목에 매료되어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대지의 표현’이라는 과목을 골랐다. 교수 이름은 카사노바였다. 카사노바라니! 첫 수업에 갔는데 강의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다음 주에 또 갔는데 이번에는 겨우 두 명의 여학생만이 교실에 있었다. 곧 트렌치코트를 입은 카사노바 교수가 오기는 했는데 그는 먼저 두 명의 학생들과 좀 심각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더니 곧 내게 아마도 인원관계상 이 수업은 폐강될 것 같다, 이 인원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인류학을 듣기로 했다. 강의실은 처음 분반 시험을 치르던 그곳이다. 첫 시간은 그래도 제법 수업이 굴러가는 듯이 보였다. 학생 수도 많았고 선생님은 성실했다. 열심히 질문하는 학생조차 있었다. 아하, 처음 느껴보는 프랑스 대학의 수업이구나 싶어, 아카데믹해진 기분으로 마치 다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양 열심히 필기를 했다. 


    그런데 그다음 주는 강의실이 비어 있고 웬 학생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스페인 교환학생이라는데 그는 친절하게도 교수가 무슨 세미나에 가서 못 온다고 알려주었다. 결강이었다. 좋아라하며 집에 갔다. 종일 수업으로 피로했던 터라 한적한 마음으로 르클레르에서 장을 보며 자투리 시간을 누렸다. 그다음 주도 무슨 이유인가로 강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잦은 휴강에 지친 나는 이쯤에서 선택과목을 그냥 팽개쳐버렸다. 어느 날 지나던 길에 같은 반 레오와 마주쳐 이런 사정 이야기를 하자 그는 브라질사람 특유의, 태양을 머금은 웃음을 띠고 대꾸했다. “프랑스 대학의 강의란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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