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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May 23. 2024

프랑스에서 문학 수업 받고 소설도 쓰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기 있는 강의는 시네마 수업이었다. 수업 내용과 선생님 모든 게 완벽했다. <400번의 구타>의 주연 소년이 이 영화감독의 소지 sosie(작중 분신)로서 평생토록 이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다던가 <스패니시 아파트먼트>에서 냉장고 내부의 내용물들은 거주민 각자의 나라를 표상하는 식료품으로서 일종의 축약된 사회학을 담고 있다던가, <영광의 날들>이 일으킨 반향으로 인해 알제리 용병의 처우가 개선되었다든가 등등의 세세한 맥락을 들을 수 있었다. 매번 ‘영화 보는 법’ 자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이 가장 버거워한 강의는 단연코 문학 강의였다. 무려 소르본 출신의 문학 선생 카롤린은 매주 의무적인 작업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 작업은 텍스트를 읽고 문학작품을 낱낱이 파헤치는 과정이었다. 매주 그녀가 나눠준 기드 드 렉티르 guide de lecture(독서 가이드)에 따라 답안을 채워가며 작품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이해해야 했다. 그 ‘작업지’들을 꼭 제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업에 참여하려면 당연히 미리 해가야 했다. 작업자의 세부 질문들에 답해가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니 말이다. 또 준비한 내용을 제출하면 그녀가 일일이 문법이나 내용을 정성껏 수정해서 돌려준다. 


     또 카롤린은 몰입력 높은 배우와도 같은 강의역량에 더해 엄밀한 연출가의 에너지를 가지고 숙제를 부과하였다. 다들 이 숙제들에 적지 아니 학을 떼었다. 그중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소설 쓰기’였다. 그녀는 아니 소몽 Anni Saumont의 스타일을 본 따 각자 단편 하나씩을 써 오라고 했다. 그것은 액자 형식을 갖추고 ‘질투’를 소재로 하며 누군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함을 의미했다. 그것을 딱 일주일 만에 해가야 했다.


    나는 문학 전공자이긴 하지만 프랑스어로 소설을 써봤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 숙제의 부담감에 짓눌려 이내 침대에 널브러져 버렸다. 조금 쉬고 나니 평온이 찾아와 밤중부터는 고요히 앉아 이 소설의 윤곽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나는 ‘질투’라는 주제와 연관하여 탱고 바를 떠올렸다.

 

    탱고. 네 개의 다리 한 개의 심장. 그것은 내가 떠나온 세계다. 질투라는 감정을 실습하고 싶다면 탱고 바에 가면 된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는 다른 이와 더 춤추고 싶어 하는지, 왜 다른 이와 춤출 때는 나와 출 때와는 다른 표정과 몸짓을 보이는지, 춤판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더듬이들이 히드라처럼 빽빽이 얽힌 채 너울댄다. 그렇다. 춤추는 인간의 다리들과 더불어 그 더듬이들이 부유하는 곳이 탱고바다. 


    Tango O Nada.(땅고 오 나다) Tango or Nothing이라는 뜻의 탱고 바 이름이자 내 소설의 제목이다. 이 잔혹한 이름을 배경으로 내가 배회했던 지하세계가 한 무더기 안개를 벗고 솟아오르고 있다. 타인을 향한 끝없는 욕구, 뱀파이어의 에너지다. 곧 자홍색 커튼 뒤로 몇몇 인물이 살아 꿈틀대기 시작하고 나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 스케치를 한다. 그들의 비밀한 삶을 훔쳐보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걷다 멈추다 계속 따라간다. 이 중 한 명이 피치 못하게 다른 누군가를 죽일 때까지. 짧은 무용극처럼 구성했다. 누군가의 죽음과 더불어 드디어 나는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단숨에 이야기를 만든 다음 프랑스어로 써 내려갔다. 알파벳은 한글보다는 비경제적인 문자여서 번역을 하게 되면 양이 배는 늘어난다. 양을 조절하려고 원고를 첨삭했는데 ‘첨’은 거의 없고 ‘삭’이 위주가 되었다. 이렇게 내 작은 소설은 가봉을 마친다. 주문받은 일주일 만에. 


    의기양양하게, 여러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클립으로 꽂아 수업에 가져갔지만 제출하지는 않았다. 일주일 만에 써 오는 데 성공한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롤린은 자신에게는 예외적인 일이라며 일주일의 말미를 더 주었다. 이 기간 동안 하루카의 생일이 있어, 하루카와 성진 씨가 나눠 쓰고 친구들의 잦은 파티장소로도 쓰이는, 충돌과 축제의 장인 그 부엌에 갔다. 루즈한 셔츠에 멜빵 반바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밴드 스타킹으로 한껏 멋을 부린 하루카가 김밥과 전, 카레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곳에는 미츠요도 있었다. 미츠요는 아직 소설 구상조차 하지 않았노라 말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순순히 숙제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츠요는 소설 숙제가 나오자마자 때맞춰 자주 결석했다. 미츠요는 애초에 할 요량이 없었기에 시간을 끌어 선생님을 체념시키려 했던 것이다. 결국 미츠요는 숙제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굴하지 않고 매 수업 시간마다 독촉했다. “자, 미츠요 내게 보여줄 것 있지 않아?”


    미츠요는 선생님과의 신경전에서 꿋꿋이 버텨냈다. 카롤린이 더 이상의 기대를 내려놓았을 때쯤에야 그녀는 안심하고 나타났다. 

    카롤린과 학우들은 내 소설의 분량에 경악했다. 돌려받은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A+라는 점수와 함께 평가가 적혀 있었다. 카롤린느는 ‘이상야릇하고도 시적인 분위기와 그럴듯한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충분히 긴 이야기’라는 평을 남겼다. 그녀는 모두의 앞에서도 내 작품이 정말 시적이며 뛰어난 작품이라고 칭찬했다.





소설 쓰던 책상 풍경



    실은 이 소설은 내 이야기를 좀 미화시킨 거였다. 소설 쓰기를 통해 그동안 품고 있던 실꾸리 중 하나가 미로를 탈출하여 작은 날개를 달고서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의 신전에서는 부질없고 어리석은 경험이나 감정이란 없었다.

    오래전 나는 삼각관계 속에 있었다. 그러다 결별을 맛본 다음 바닥을 뒹굴도록 울적하던 참에 누군가 탱고를 같이 배우자고 하여 바에 가게 되었다. 바에 간 첫날, 헤어진 사람을 하필이면 거기서 마주쳤다. 짧은 눈인사 이후 그와 나는 서로 외면하여 멀어져 갔다. 

    새로 속한 동호회가 즐거울 리 없었다. 기분을 바꿔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해도 그 사이에는 늘 그가 끼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재주가 있는, 소위 ‘대중적 감’이 발달된 인물이었고 그의 발은 전국에 걸쳐 넓었다. 결국 나는 위로를 받으러 갔던 세계에서 다시금 고통을 곱씹으며 이 소사이어티의 여집합이 되었다. 


    탱고가 지고의 행복만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넋을 조련시키기엔 좋았다. 거듭되는 반도네온(탱고의 독특한 음색을 주도하는 악기) 음률 속에 증폭되어 가던 회한을 뒤로하고 나는 그 세계를 떠났다. 이 소설을 씀으로써 그를 눈 치우듯 길 가장자리로 쓸어냈다. 글쓰기란 감정 쓰레기 분리수거에 효율적이었다. 내 안을 맴돌던 고통에 입을 그려주는 일이 필요했다. 이렇게 내 고단했던 탱고슈즈는 물결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문학수업 중엔 이런 일도 있었다. 영국 아이들 중에는 머리 가운데 라인을 세워 도끼날이나 투구 모양으로 만들고 다니는, 살집 좋고 볼이 발그레한 토마라는 친구가 있었다. 발그레한 볼이라는 것 자체가 참 영국적인 느낌을 준다. 토마는 조단과 단짝이었는데 조단은 영리하고 약간 왜소한 반면 토마는 덩치가 좋아서 나는 그를 마치 왕자와 같이 다니는 떡대 좋은 친구 기사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이 토마가 카롤린의 강의 중에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때는 아나 가발다의 소설에 나오는 한 비유적인 표현 ‘발코니’를 다룰 때였고 카롤린이 보충설명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여자의 풍만한 가슴을 은어로 ‘발코니’라고 부른다고 한다. 카롤린은 브래지어를 지칭하는 불어를 가르쳐 주며 이해를 돕기 위해 브라를 한 여자들의 사진을 돌리고 있었다. 그 사진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패스되어 토마에 이르렀다. 자기만의 사념의 장에 있던 그는 문득 난감해하며 말했다. “이게 뭐죠?” 

    선생님은 장난처럼 되물었다. “왜, 그게 맘에 안 들어?” 

    토마는 뉘엿뉘엿 우물거렸다. “세 봉, 메... C'est bon, mais...”(아 네, 좋아요, 하지만....)

    그의 난데없는 반응에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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