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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May 27. 2024

카니발 행렬 속 재회


    카니발 전 주말, 나는 피레네대로 근처에 있었다. 축제 기간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행렬이 근처에서 와서 또 다른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문득, 진한 갈색 털의 좀 빳빳해 보이는 외투에 곰 가면을 쓴 여인이 나를 아는 척해서 화들짝 놀랐는데, 가면을 벗은 얼굴은 바로 1000개의 달걀 오믈렛 때 만났던 제니였다. 그녀는 지방신문에서 마감일을 하는 애인과 거닐고 있던 참이었다. 반가워하며 한동안 같이 걸었다. 그녀는 내게 이 지역 풍습들에 대해 모조리 가르쳐 주겠다며 흥분했다. 


    제니는 축제 행사 중 수요일에 있을 곰 사냥이 가장 재미있다며 그 날 또 만나자고 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에리나까지 데리고 나갔다. 에리나와 제니도 금방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 성 근처 빈터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남자들은 여장에 여념이 없었고 여자들은 모자와 수염 등으로 사냥꾼 변장을 했다. 주변에는 흥겨운 민속음악에 맞춰 무도회가 벌어져 있었다. 발만 재빠르게 움직이는 전통춤이었다.





사냥꾼 변장을 한 여자들




    이 지역에서 곰은 건장한 남성성을 상징한다. 예전에는 피레네에 곰이 살았지만 지금은 순수한 야생 곰은 사라져 대신 동유럽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곰이 산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 곰 탈을 뒤집어쓴 남자들은 거대한 인조 성기를 가지고 다니며 사냥꾼 여자들을 덮치고, 여기저기서 날뛰는 이 곰들을 사냥꾼들이 힘을 모아 굴복시켜 사슬로 묶어버리면 행사는 절정에 달한다. 이 난장 다음에는 여장 남자들의 미녀선발대회가 이어진다. 여장남자들은 교태 넘치는 말과 노래, 제스처, 춤을 시전한다. 색색의 스타킹, 미니스커트, 브래지어와 가터벨트가 넘실댄다. 왁자지껄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공터에는 음악이 흐르고 모두 한바탕 어울려 춤춘다. 스텝 같은 건 몰라도 상관없다. 




여장대회를 준비하는 남자들





    며칠 후 일요일은 카니발의 클라이막스였다. 제니와는 그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시내의 거대한 샤피토(임시 가건물)에서 식사와 주류가 곁들여지는 무도회를 즐기기로 한 것이다. 이날은 어찌나 추운지, 에리나와 나는 둘둘 싸매고 매서운 2월의 바람 속을 걸어 시내까지 갔다. 


    천막 안에서 식사 대기 줄은 이미 굉장히 길었다. 제니를 기다리다 일단 우리 먼저 줄을 섰다. 그리고 제니는 상당히 늦게 도착했다. 

    장내가 소란스런 만큼 안그래도 수다스런 제니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먹으면서도 그녀의 설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것은 아주 질 좋은 크림이고 저것은 꽤 좋은 치즈고 바욘느의 장봉은 질감이 아주 고급스럽네 어쩌네, 쉬지 않고 설명하려 들어서 옆에 앉은 다른 프랑스인조차 ‘왜 저러지?’하는 눈치였다. 게다 그녀는 우리를 실컷 기다리게 해놓고는 딱히 미안한 기색이나 이렇다 할 사과도 없었다. 


    식사는 한껏 기름지고 무거웠다. 그것들은 크렘 샹티이crème chantilly(양질의 크림), 콩피 드 카나르confit de canard(염장 오리 다리 요리), 장봉 드 바욘jambon de Bayonne(바욘의 장봉), 그리고 다소 짭짤한 치즈 한 조각이었다. 무엇보다 이 조합은 온통 느끼해서 다 먹어치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남기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꾸역꾸역 먹었으나 에리나는 기름기에 물려 어느 시점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놓아버렸다. 그랬더니 제니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켈 사크릴레주! 코망 레세 뒤 장봉 드 바욘!”Quel sacrilège! Comment laisser du jambon de Bayonne!(이런 신성 모독이 있을 수가! 바욘의 장봉을 남기다니!) 

    그러고서는 훈계하듯 내뱉었다. “이런 식사는 베아른 농부의 추운 겨울을 위한 식사지 너 같은 프티트 말레지엔느(작은 말레시아 여자)를 위한 게 아냐!”


    안 하니만 못한 말이었다. 나는 멈칫했다. 나의 심리상태에 무감각한 제니는 멋모르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머지않아 멜리에스에서 한국 영화 <마더>를 할 거라며 나와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냉각된 나는 주말도 주초도 주중도 아무리 해도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식사 후, 앞쪽 스테이지에서 무도회가 벌어졌다. 또 베아른의 전통 스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니는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우리를 버려 둔 채 무도행렬 속에 파묻혔다. 에리나와 나는 제 흥에 겨워 우리를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돌아와버렸다. 이게 마지막이었고 이제 그녀는 그냥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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