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Jun 03. 2024

프랑스에서 김치를 담다     



    이때의 2월을 생각하면 그저 왁자지껄할 뿐이다. 학교에서는 밀레나의 정치적 관심사에 합류할 수도 없고 자닌의 엄청난 기대치에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으로 인해 학업 면에선 그다지 알곡 차지 못한 나날을 흘려보냈다. 언어 습득 중 고급 단계에서의 진보는 훨씬 느리게 느껴져 첫 학기만큼 내 실력이 늘어가는 걸 체감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시내의 구경거리는 카니발로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카롤린은 주말 직전 수업에서, 이제 곧 브라드리braderie(대대적인 세일시즌)가 다가오는데 예쁜 물건들을 헐값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니 특히 여학생들은 이를 놓치지 말라고 귀띔했다. 



    이 시즌을 앞둔 어느 날 하굣길에 여느 때처럼 르클레르를 통과해가고 있었다. 언뜻 이 건물 미용실에 익숙한 세 얼굴이 보였다. 같은 반의 레안과 릴리 그리고 슈네이드가 옹기종기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안의 손등 위에는 단어가 하나 적혀 있었다. ‘데그라데dégrader’라고. 이 단어의 미용실적인 의미는, 층이 지게 커트하는 걸 말한다. 주문할 때 잊지 않으려고 그런 단어까지 적어오다니, 귀여웠다. 


    그리고 그 다음 주 그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의 헤어스타일은 미용실 가기 전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살짝 층만 내서인가? 레안은, 이런저런 주문을 구체적으로 하기에는 의사소통의 한계가 있는 데다, 여기 미용사들은 ‘그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하염없이 짧게 쳐내기 때문에 길이는 그대로 둔 채 숱만 다듬는 데그라데만 해야 했다고 한다. 


    우리 같은 학생들에게 미용실에 가는 것은 큰맘 먹고 한 번씩 해보는 행사다. 보통은 옷도 매일 같은 것만 입고 머리도 서로 잘라주거나 하며 지냈다. 유행으로부터도 다소 멀어진 우리들의 소박한 차림새. 친구들의 작은 꾸밈새조차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작은 기표가 되었다. 친숙함의 향연 속 모두가 서로에게 예뻤다. 그러나 옷은 그렇다 치고 머리는 계속 자라므로 셀프커팅으로만 버틸 수는 없어서 결국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나도 머리를 자르고 싶던 참이었다. 하다못해 데그라데만이라도. 그리하여 브라드리 시작 날 오전 집 근처 미용실에 갔다. 주인은 삽시간에 나의 스타일을 바꾸어 놓았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머리를 감기고 난 직후, 물이 뚝뚝 떨어지다시피 한 상태에서 자른다는 점이 신기했다. 내 머리는 꽤 짧아져 나 스스로는 약간 어색했다.


    이 가벼운 머리를 하고 에리나와 시내에서 만나 쏘다녔다. 에리나는 내가 머리를 자르니 좀 더 단호해 보인다고 했다. 둘이서 날이 저물 때까지 쇼핑을 했는데 에리나와 나는 주로 네팔 옷 가게 ‘콜린느Colline’에서 잔뜩 충동구매를 했다. 통이 넓어 치마처럼 보이는 바지와 셔츠, 외투 등을 두루 챙겼다. 에리나가 몹시 맘에 들어 했지만 키 작은 그녀에게는 커서 내가 대신 산 옷도 있다. 아뿔싸, 내 기숙사 옷장은 이번 학기에 사들인 옷들로 슬슬 넘쳐나기 시작했고 이 충동구매의 결과물들은 결국 머지않아 국제택배의 혜택을 입게 된다.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김치 담그기다. 한국에 있을 때 김치를 담가 먹는 일이란 당연히 없었다. 훌륭한 김치들이 다양한 맛으로 팔리고 있으니까. 김밥전문점이 동네마다 넘쳐나기에 김밥을 말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단지 만드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오래전에 김치 깍두기를 종류별로 두 어 번씩 해봤을 뿐이다. 그런데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김치를 담가 성공하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필수적인 먹거리를 스스로 조달하며 살았다는 성공담을 남기고 싶기도 했고. 


    다행히 필요한 재료들은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사정이 여의하지 않은 품목들은 ‘꿩 대신 닭’의 개념으로 채워 넣었다. 배추는 마트에서 ‘슈 쉬누아chou chinois'(중국 배추)라고 팔았는데 우리 배추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것으로 타일랜드나 모로코의 매운 고추를 넣고 배춧국도 곧잘 끓여 먹었다. 그리고 르클레르에는 에스펠레트Espelette 산産 고춧가루도 있었다. 파로 말하면, 프랑스 파가 뻣뻣하고 즙이 없는 까닭에, 대신 ‘양파’라 불리는, 끝이 동그랗고 그 위로 길고 파란 파가 달린 것을 썼다. 생강과 마늘은 가루로 대신했다. 생마늘을 쓰고 싶어도 블렌더가 없는 데다 어차피 섞어 놓으면 물기에 불어나 마늘 구실을 하지 싶었다. 젓갈이 없는 대신 멸치와 다시마를 끓여 우려낸 국물을 섞었다. 가장 중요한 천일염 대신 게랑드Guérande의 굵은 소금을 사용했다. 이리하여 절이고 헹구고 물기를 뺀 다음 썰어서 버무렸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네 번 정도 김치를 담갔다. 김치들은 대개는 우연한 성공을 거두었고  개중에는 꽤 맛있는 것도 있었다. 그때 생각대로라면 귀국 후 제대로 된 재료들을 써서 의욕적으로 담가 먹을 기세였으나 막상 귀국하자마자 배춧값 폭등이며 뭐며 그냥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