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Jun 06. 2024

무엇보다 인간다운 일상의 배경



어떤 태양의 늦사춘기          



내게 당위들이란

각각의 동공과 머리카락을 지닌 수많은 마녀들처럼 

고혹적이었다    

 

나로 말하면

선량하고 아름다우며 더욱이 부지런한

태양이었다     


지상에는 충실한 돋보기가 있었고

방대한 잉여물을 태우는 것은 

내 일과였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출근한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울기 위하여

잠자리로 도로 기어든 아침이었다    

 

그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작태였다고

때로 울부짖는다    

 

밤사이 그녀들은 미친 듯 싸워

동공들은 튀어나오고 머리카락들은 뒤엉켜 

내 작업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내 유년기의 종말이었다   

  

그제야 마녀들은 다시금

쓰레기를 태우는 거대한 임무를

지나치게 친절히 설명하려 들었으나   

  

내 심장의 초점을 맞춰줄

돋보기란 더 이상 지상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날로부터 나는

분노로 터질 듯 누렇게 뜬 얼굴을

허공에 담아둘 뿐이었다    



 

    스무 살 즈음의, 젊음에 대한 포기 각서 같은 시다. 이 시의 원본은 사라져, 이것은 기억 속의 시다. 어렸을 적, 나는 펜 위에서 발레를 추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창조의 열정 따위는 더 이전 세기에 태어나 가졌으면 좋았을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실망’은 여태까지의 삶의 주요 감정이었고 그다음에는 ‘체념’이 왔다. 동시대인들의 연극을 믿지 않겠다는, 나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포기였다. 내 마음 상자는 오랫동안 냉동고에 결빙된 채 처박혀 있었다. 자꾸만 냉소적이 되었다.      


    사실 르클레르만 해도 적지 않은 재료들이 웅크리고 있다. 참기름과 콩나물조차 보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르클레르에 없는 재료를 찾고 싶을 때는 마르셰 엑조티크marché exotique로 갔다. 마르셰 엑조티크의 주인은 베트남 아저씨인데 그는 내가 갈 때마다 날 처음 본다는 듯 매번 국적을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번번이 월드컵이며 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쨌든 집 근처의 이 유일한 아시아 상점에는 나름 살 만한 것들이 많았다. 좀 비싸긴 하지만 라면과 컵라면, 두부, 칼국수 생면, 나또, 팥과 녹차가 들어간 얼음과자며 찰떡 아이스도 있었다. 더운 낮, 팥 얼음과자를 깨물며 집으로 돌아오면 행복했다.


    여기서 구입한 것 중 실패한 품목도 있었는데 중국 간장과 카레가 그러했다. 중국 간장은 ‘버섯 간장’이라는 이름에 혹해서 샀는데 색이 매우 검은 데 비하여 아무런 짠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간이 맞게 되려면 짜장면보다 진할 정도로 많은 양을 집어넣어야 했다. 이 간장을 넣으면 모든 음식은 검어졌다. 결국 그냥 버렸다.


    그런가 하면 카레는 종류가 매우 많았는데 분말로 된 것 중에는 심지어 지로플girofle이라는 재료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이 가루는 개었을 때 아무런 점성도 생겨나지 않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었던 데다, 치과 향 카레의 해괴한 맛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왜 오뚜기 카레처럼 명쾌한 맛이 없는가. 이 지로플 맛 카레 가루가 혹시 생선 요리에 들어가면 비린내를 잡아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별 신통한 효능이 없었고 그리하여 남은 가루는 끝내 버려야 했다.


    이 아시아 상점에 가는 일은, 꼭 거기에 쓸 만한 물건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중간에 오가는 길을 즐기기 위함이기도 했다. 예쁜 주택가와 계절의 꽃들, 미용실이나 작은 바들, 유치원들,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지극히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천국의 무료함이 뿜어져 나올 만큼 이 도시의 주택가들은 사람 사는 곳 같지 않게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아, 아니, 사람 사는 곳답게.   


      




    포에서 내가 다닌 모든 길들은 정말 그랬다. 도무지 불길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이 지역의 햇살 아래 모든 게 심심하리만치 온화했다. 나무와 꽃과 새, 집들은 요정들의 동네처럼 오로지 예쁘기만 해서, 생활에 필요한 여타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공해 문제를 일으킬 법한, 이를테면 인쇄소나 공장, 도축장 따위들은 이 도시 어디에 숨어 있나 궁금해지기도 했다.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카르푸 같은 대형마트들은 도심을 피해 지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번잡하고 지저분한 것은 최대한 외곽에 두고 사람 사는 곳은 온통 우아하게만 해놓고 사는 것이다. 


    한 가지 진실을 환기하게 된다. 한 도시에서 매일 다니는 길과 거리의 느낌들은 시민의 삶에서 그대로 일상의 배경이 되어 삶의 색깔을 결정한다. 슬프게도 우리네가 사는 길과 거리는 아름답다고 선뜻 말할 수 없다. 산을 파괴해 자꾸만 아파트를 올리고 간판들은 두서없이 범람한다. 


    포의 햇살 속에선 내가 저항할 사이도 없이, 냉동실에 들어가 잠자던 마음의 끝없이 유예될 것 같은 해빙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그저 그들의 일상을 엿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공기의 입자들을 흡입했을 뿐인데. 그러면서 일상은 원래 지루하고 비루한 것만은 아닐 거라 여겨졌다. 또 일상이란 개인 각자가 색칠하기에 앞서 그 이상으로, 공동체가 그려내는 조감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다 같이 그려가는 그림이, 그 무리 전체의 매일의 빛깔을 만들어낼 것이다. 







    형이상학은 뒤로 하고 프랑스에서 내가 피상적 수준으로 발견한 행복의 조건이란 꽃과 나무, 공원, 축제 그리고 마주치는 이들끼리의 조건 없는 수용과 환대다. 자연과의 공존, 서로 반기며 사는 일, 그 간단한 데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회 내에도 고질적 문제와 갈등은 많겠지만 프랑스는 최소한 서로 간의 미소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나라다. 그런 공기만큼은 밀봉이라도 해서 가져오고 싶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너무 당연한 예의와 환대’를 한 점 스포이드로 떠 옮겨 오고 싶다. 그리고 기왕이면 나의 일상도 나비처럼 흥얼흥얼 가볍고 싶다.  

   







포를 재방문했을 때 에리나가 다시 해준 닭요리 아얌 마사 케첩




      향신료에 졸인 닭요리 아얌 마사 케첩




    그곳의 일상에 곁들여 즐거운 회상이 있다. 이를테면 에리나의 애정 넘치는 닭요리 같은. 우리는 특히 ‘아얌 마사 케첩’이라 불리는 그녀의 닭요리에 열광했다. 우리는 그것을 한 번 맛본 이후 모이기만 하면 두고두고 아얌 마사 케첩 타령을 했다. 그것은 닭 조각들을 튀겨낸 다음 계피와 아니스 등 여러 향료와 케첩을 넣은 소스에 조리는 것인데 이 요리의 이름은 우리들 사이에서 마치 행운과 입맛, 즐거움과 우정 등과 같은 뜻의 암호로 통용되었다. 일테면 ‘모여 흥겹게 즐기자!’라는 말 대신 ‘아얌 마사 케첩!’이라고 하면 되었다.





      송어탕수를 만드는 과정. 먼저 송어를 튀기고


 채소를 볶고 소스를 만들어





튀간 송어 위에 뿌린다





    그 외에도 그녀는 송어를 튀겨 갖가지 야채와 토마토 소스를 끼얹어 먹는 탕수어라던가 말레이시아에서 즐겨 먹는다는 바나나 튀김도 만들어주었다. 에리나의 가장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요리 이야기는 마지막 장으로 미룬다.


이전 21화 프랑스에서 김치를 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