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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Jul 01. 2024

맨유-볼튼 전을 관람하다




    맨체스터로 가는 길에 체스터를 거치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에리나의 추억 여행은 이어졌다. 그녀의 은사님을 만나 식사를 한 것이다. 이 건장한 노신사는 한국 전쟁 직후쯤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이 있어 지갑에서 우리나라 전후戰後 모습이 담긴 빛바랜 사진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체스터는 건물들이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로 독특했다. 체스터의 숙소도 좋았다. 우리 숙소는 꼭대기 다락방으로 편하고 낭만적이었다. 사랑스러운 이 방에서는 창문을 통해 이웃집 지붕들이 보였다. 이 건물의 1층은 펍이었는데 역시 숙소 주인이 운영했다. 배 나오고 풍채 좋은 이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라고 불렸는데 인심이 후했다. 바에서는 우리에게 맥주 한 잔씩을 주는가 하면, 시설이 덜 완비되었다며 숙박비도 적게 받았다. 심지어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10퍼센트를 더 깎아 주기까지 했다. 이런 아저씨 덕에 영국은 후한 곳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에 비하면 프랑스에선 친절은 친절이고 계산은 계산이었다. 

    펍에 모여 있던 동네 사람들도 모두 한 가족처럼 우리를 친근히 대했다. 세 명의 아저씨가 일렬로 늘어서 춤을 추며 ‘I love you baby~'하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여기 묵는 동안 우리는 볼튼의 리복Reebok 경기장에 가서 맨유-볼튼 전을 보았다.     에리나가 볼튼의 친구에게 부탁해 티켓을 예매해둔 것이었다. 에리나는, 장내의 함성이 표효하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는 한 번쯤 꼭 맛봐야 한다며 이 관람을 우리에게 권하였다. 그리하여 딱히 어느 편도 응원할 맘이 있지 않은 나는 단지 ‘영국 축구 경기 체험’이라는 명목하에 생면부지의 볼튼 시민들 틈에 끼어 경기를 구경했다. 대신 에리나는 영국에 있을 때 이미 실컷 축구장 분위기를 만끽했었기에, 우리를 경기장에 몰아넣고는, 경기 시간 동안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오겠다며 미용실에 가버렸다. 경기 후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머리는 노랗게 염색되어 있었다.





    경기 시작 전 내 옆으로 웬 청년이 수줍은 듯 인사를 하고는 앉았다. 그는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더니 반가워하며 이청용 선수에 대해 칭찬의 몇 마디를 건네었다. 이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 얌전한 청년마저 느닷없이 야수로 돌변해서는 있는 대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심코 맨유를 응원했다가는 몰매를 맞을지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가 무르익으면서 관중석에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이 생겼다. 그는 곧장 체포되어 퇴장당했다. 이런 경우 이곳 법에 따르면 평생 경기장 출입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박지성 선수와 이청용 선수도 보았는데, 박지성은 모습만 보이고서는 그다음 있을 뮌헨 전을 위해 결장했고 이청용은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날 볼튼은 자살골까지 넣어가며 맨유에 완패하고 말았다.


    함성은 마치 <300>이라는 영화를 방불케 했으며 구호와 응원가들은 너무나 우렁찬 나머지 해독 불가였다. 우리가 나중에 머리를 맞대고 해독한 바로는 ‘Bolton super army!'와 'Wonderer,Wonderer,Wonderer' 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내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이 'Wonderer,Wonderer....’노래가 계속 메아리치더니 하루 종일 무한반복 재생되었다. 축구장 후유증이었다. 


    다시 리버풀로 돌아와 에리나와 작은 작별을 했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와서 에리나의 영국 친구들은 그녀를 파리로 초대해 깜짝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에리나와 헤어지고 우리는 곧장 더블린으로 갔다. 

    더블린의 숙소 ‘테스’는 이상적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바람 많고 기온 낮은 더블린의 밤을 지낼 수 있게끔 따끈하게 데운 핫팩을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껴안고 자니 뜨듯했다. 주인아저씨는 여행사를 운영하기도 해서, 초행인 우리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일정을 체크해 주는가 하면, ‘더블린 10경’, 즉 더블린에서 누려야 할 것 10가지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유명 식당에서 고기 요리를 주문할 때는 반드시 그래비 소스를 ‘두 스푼’ 요구하라고 귀띔했다. 


    더블린의 길이 몹시 복잡한 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비게이터 ‘탐탐’이 여기서는 잘 작동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이 내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거기다 대고 말대꾸도 하고 놀았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삐졌는지 소통이 불가했다. 어쩌다 작동되기는 했는데 지시를 따르다 오히려 엉뚱한 길이 나와 역주행을 하는 일마저 생겼다.  









    더블린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은 기네스 맥주 공장에서였다. 4월인데도 더블린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기네스 건물 꼭대기에서는 견학을 마친 사람들에게 기네스 한 잔씩이 전용 잔에 담겨 제공된다. 그곳에서 기네스를 제대로 마시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창문 가까운 탁자에 기네스 잔을 올려놓았다. 통유리 창을 통해 더블린 전체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기네스!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생일이기도 했다.

    또 어느 호텔 로비 찻집에 가서는 숙소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3단 디저트가 곁들여진 애프터눈 티 세트를 주문했다. 아저씨는, 이러고 있으면 레이디가 된 기분일 거라고 했는데 적어도 우리 주변에 앉은 이 나라 아주머니들은 그런 기품이 있어 보이기는 했다. 


    더블린을 떠난 우리는 코크와 딩글로 이어지는 해변을 달려 골웨이로 향했다. 아일랜드의 자연으로 말하면 묘사가 힘들다. 묘사란 어느 정도 우리 안의 선험적인 자료를 토대로 삼게 마련인데, 아일랜드 자연은 내 경험의 역사 속에 들어와 본 적 없이 독특했다. 그걸 말하려면 아일랜드 배경 영화를 봐 두었거나 혹은 암석과 토질, 수종 등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요정이 나온다는 전설의 호수, 양들이 제 세상인 양 거니는 나머지 차들이 비켜 지나가줘야 하는 도로, 햇빛이 비처럼 쏟아지는 근사한 해변이 있었다는 정도이다. 





    꿈같은 아일랜드 여행을 마치고 더블린 공항에서 차를 반납한 뒤 런던으로 갔다. 매끼 식사에 라면과 밥이 제공되는 민박에 묵으며 매일같이 공원을 거닐거나 <오페라의 유령>이니 <빌리 엘리어트> 등의 뮤지컬을 보면서 휴가의 마지막을 즐겼다. 런던은 크고 시끄럽고 지저분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도시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몇 번이고 다시 걷고 싶다. 공원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도시락을 먹은 다음 친절한 아가씨가 얹어주는 블루베리 토핑의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말이다. 또다시 가고 싶다. 미술관에서 만난 고흐의 <해바라기>, 익살스럽고 시끌벅적하게 술렁이는 코벤트 가든, 버드나무 우거진 강가의 다채로운 캠던 록 마켓, 그리고 사시사철 모든 요일의 오후마다 걷고 싶은 노팅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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