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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Jul 04. 2024

악명 높은 선생님과의 학기 시작




    영국에서는 정신없이 즐거웠다. 런던의 비싼 물가 때문에 비록 숙소는 열악했지만 그 유명한 런던의 뮤지컬도 보았고, 내가 ‘굴 카드’라 불렀던 오이스터 카드를 끊어 다섯 개쯤의 언어가 한꺼번에 넘실대는 이층 버스도 원 없이 타 보았다. 그러다 보니 포로 돌아가야 할 날이 가까워간다. 런던의 이층 버스 안에서 에리나의 전화를 받았는데, 분반 시험 결과 나는 도로 기존의 반에 남게 된다고 했다. 새 학기에 신설된다는 ‘완성반’에 진급하지 못한 것이다. 에리나도 의외라고 했다. 이층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기울기만큼의 실망이 밀려왔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포로 귀환했다. 다시 만난 도시와 학교 주변은 온통 노란 꽃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벚꽃과 수선화들이 다 사라져 버린 대신 잔디 위가 온통 노란 융단 같았다. 민들레 천지였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학교 게시판으로 향했다. 분반 결과는 과연 좀 이상했다. 오히려 더 하급반의 친구들이 대거 완성반으로 진급했고 기존 우리 반의 태반은 그대로 나와 함께 남아 있었다. 친구들은 이 초유의 사태가 밀레나와 자닌의 채점 기준이 다른 선생님들보다 높은 데서 기인했다고 추측했다. 


    결과는 서운했지만 악명 높은 테오도라를 피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테오, 테오도라, 그녀는 완성반에 내정되어 있었다. 겉으로 뿜어나는 분위기만으로는 모든 선생님 중 비호감이다. 그녀는 부드럽지 않은 생김새에다, 동양 학생들은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정치적 이슈를 수업 시간에 자주 다루었으며, 더군다나 학생들에게 종종 짓궂은 멘트를 날리곤 했다. 민감한 학생들은 이것을 꽤 공격적으로 느꼈다. 테오도라는 학생이 질문에 우물쭈물하면 곧장 비아냥댔다. “주말 동안에 뭐 했어? 사랑을 찾아다녔나?”

    에리나가 직접 겪은 일이었다. 결국 예민한 에리나를 비롯한 서너 명이 한 단계 아랫반으로 가버리고야 말았다. 일본 친구 미츠요도 항상 테오도라를 두려워했다. 모든 증언을 참고하면 내가 진급 못 한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새 학기 첫날은 짧은 머리의 온화한 도미니크의 수업이다. 그녀는 서로 짝을 지어 상대방에게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물어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3학기쯤 되니 이제 이런 놀이는 식상했다. 이 인위적인 친교 놀이에서 나는 영국 친구 제이스와 한 조가 되었다. 그녀의 아주 샤프해 보이는 생김새는 날카로움의 화신이라 할만했다. 창백한 안색과 날렵한 윤곽, 금발, 눈썹, 눈매, 코끝, 얇은 입술, 모든 게 그랬다. 또 생김새만큼이나 그녀는 독특했다. 데카르트를 좋아하는 대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할 만한 것들, 이를테면 햇빛, 꽃, 동물 등은 모조리 싫어했다. 유별난 답변들의 행렬은, 그녀의 거의 웃음기 없는 표정과 더불어 혹시 제이스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잠시 자아냈다. 


    질의응답을 통해 알게 된 그녀의 생활은 주로 피레네 대로에 있는 아이리시 펍 ‘골웨이’를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새벽까지 일하느라 결석이 잦았고 이런 ‘체험,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새 프랑스어의 구어체가 지나치게 입에 밴 나머지,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어법이나 작문에 애를 먹곤 한다고 조금 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어느 수업 시간에 서 영국 친구들은 원래 제이스가 술을 마시거나 할 때 빼곤 거의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제이스와의 짧지만 인상적인 일문일답 후에는 수업에 대한 건의 사항을 적어내는 시간이 뒤따랐다. 한참 적는 와중에 선생님이 갑자기 에미코와 미츠요 그리고 나를 따로 불러내더니 오후에 마리 크리스틴의 사회 문화 과목을 청강하라고 권유했다. 이 완성반 과목을 들어보고 적응할 만하면 그리로 반을 옮겨도 좋다고 했다. 미츠요는 내게, 테오도라가 자기 반 인원이 부족해서 도미니크에게 부탁한 것 같지만 자신은 그 반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굳이 악명 높은 테오도라에게 가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오후 수업은 떠밀리다시피 듣게 되었다.


    이날 오후 131호 강의실에서 마리 크리스틴은 우리를 환대하며 이미 클래스의 당연한 일원으로 간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희극배우처럼 유머러스한 어조로 한 학기 수업을 안내했다. 이 학기에는 앙리 4세 서거 400주년을 맞아 이 역사적인 왕에 관해 공부한다고 했다. 마리 크리스틴과 역사 선생 미리암이 협력하여 성 방문과 관련 전시 둘러보기 프로그램을 마련한 참이었다. 시청각 강의와 학생들끼리의 설문 조사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역사 시간에는 왕가 계보도와 함께 영화 <여왕 마고>의 앞부분을 보기도 했다. 오래전에 별생각 없이 봐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마고가 정략 결혼한 멍청하고 매력 없어 보이는 자가 바로 앙리 4세였다.


    이 주제는 이미 첫 학기에 대학원생들과 함께 지겹도록 다룬 것이 아닌가. 나는 나름 지식이 있어서 마리 크리스틴이 설명하는 내용 대부분이 익숙했다. 단지 새로이 추가된 사실이라면 앙리 4세의 암살자가 어떻게 죽었나 정도였다. 그는 광신도였는데 아무 경호 없이 산책하고 있던 앙리에게 달려들어 등을 찔렀다고 한다. 범인은 체포되어 ‘몽둥이로 흠씬 두들김을 당한 끝에’ 한국의 옛날 형명으로 치면 ‘거열형’이란 걸 당해 죽었다고 한다. 


    수업 후에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내게 마리 크리스틴은 내가 반을 당연히 옮겨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 했더니 “생각해 보고 말고가 아니라 마땅히 옮겨야 해. 이 반까지 하고 나야 하나의 써클을 다 마치는 게 되지.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어.”라고 못을 박았다. 이로써 내 마음은 80% 정도 설복되었다. 


    사실 이 완성반은 다른 반보다 200유로 이상 저렴한 학비에 주당 수업 시간은 2시간 적다. 심지어 수요일 하루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이런 무시 못 할 장점의 유혹, 남는 걱정이라면 심술궂은 테오도라를 견디는 일이었다. 미츠요도 일단 테오도라 수업에 한 번 들어가 보고서, 안 본 사이에 그녀가 혹여 변하기라도 했다면 반을 옮기겠다고 했다. 결국 나도, 마지막 한 학기밖에 안 남았는데 어쩌랴 싶어 그냥 완성반에 가기로 했고 이 결심이 변함없음을 스스로 확인한 날, 환불을 받기 위해 다시 한번 유학원에 편지를 썼다. 그러고 있으니 내가 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된 기분이라 잠시 뿌듯했다. 유학원에서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제 정말 프랑스어 잘 하시겠어요. 완성반 단계까지 간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약간 씁쓸했다. 가시적 결과를 막론, 여전히 내게 프랑스어는 가시밭길이었다. 어떤 사람은 조금 얻게 된 지식만으로도 다 안다는 듯이 써먹는가 하면 어떤 이는 최종 자격증까지 다 따고도 여전히 자신 없어 하는 걸 보면 언어 공부의 90퍼센트는 성격이지 싶다. 공부가 채워진다고 자신감까지 비례해서 채워지지는 않았다. 완벽주의자들일수록 빠져드는 자기 비하의 함정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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