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밝은 햇빛 아래 요크는 전형적인 고딕 건물들로 고풍스러웠고 골목마다 예쁜 수공예품도 많았다. 거리의 악사는 전자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멋진 거리와 골목, 시장들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성을 둘러보고 오래도록 호숫가 산책도 했다. 영국에는 도처에 넓디넓은 공원인데 프랑스에는 그런 공간이 드물다고 투덜대던 에리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이곳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크셔푸딩도 맛봤다. 내 입맛에는, 먹기보다는 보기에 더 근사한 음식이었다. 그래비 소스가 흘러내려 탐스러워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맛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하여 우리의 루트는 요크에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거쳐 리버풀과 체스터, 맨체스터로 이어졌다.
에든버러는 우중충한 게 얼마나 멋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도시였다. 성들과 옛 건물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급우 카트리나는 어딜 가 봐도 에든버러만 한 곳이 없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러했다. 스코틀랜드답게 체크무늬 천도 천지였지만, 짐의 압박 때문에 부피 나가는 것들 대신 내 고양이에게 씌워줄 작은 체크무늬 모자와 목도리 세트, 수도원에서 만든 검고 가벼운 뿔 그릇과 티스푼, 누르면 전통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백파이프 모양의 기념품 등을 샀다. 영어가 완벽한 에리나와 민지 덕분에 의사소통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단지 내가 입을 열어 현지인과 몇 마디라도 할라치면 영국과 인근 나라 영토들에서는 프랑스 억양의 영어라며 재미있어들 했다.
요크셔푸딩
무엇보다도, 에든버러 추억의 1위는 괴상한 한인 민박이었다. 웬 목사가 운영하는 민박은 시내에 가까운 지점과 목사가 기거하는 본점 두 군데였는데 이 목사는 접근성을 이유로 시내 쪽을 권한 다음, 대신 저녁은 본점에 와서 먹으라고 했다. 밥 먹기 위해 차를 타고 본점까지 간다니 번거로웠지만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본점에서 어색한 식사를 끝내고 돌아와 우리는 수군대었다. 뭔가가 석연찮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다. 목사는 스코틀랜드에서 오래 살아서 잘 안다며 우리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어 싸한 분위기를 만드는가 하면,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우리 숙소 주방에서 정통 스코틀랜드식으로 제공될 거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대단한 만찬이라도 나올 기세였다. 또 목사는 저녁밥은 이렇게 와서 먹거나 아니면 도시락의 형태로 배달해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당연히 도시락을 택했다.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는 한 이탈리아 남자와 그의 애인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옷장과 서랍을 열었을 때 거기는 이미 거주자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 관리자의 애인인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Sorry." 하고는 옷장과 서랍 속의 자기 물건들을 주섬주섬 들고 나갔다. 그랬던 거다. 그녀는 숙박자가 없을 때는 이 방에 거주하다가 손님이 차면 본점에 가서 자는 거였다. 여기엔 자기 약혼자의 방이 있지만 남녀 혼숙을 허용하지 않는 목사 때문에 그리 해야 했을 거다. 우리의 추론은 그러했다.
게다가 우리는 처음엔 그래도 욕조가 있다며 좋아했는데 그것은 곧 무용지물이 되었다. 막상 이용하려 드니 욕조 마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 한 명은 아까 분명코 욕조 마개를 봤다는 것이다. 그새 치운 것이다. 물의 낭비라도 막으려 했던가? 결국 또 다른 욕실의 샤워기를 이용해야 했는데 이건 또 기이하게 뻑뻑한 나머지 엄청난 완력을 가해야만 작동했다. 도대체 예사로운 거라곤 없었다.
그다음 날 아침, 아래층으로부터 무언가 중얼중얼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가 주방 문 뒤에서 귀를 기울였더니 그것은 목사 일행이 관리자 청년과 함께 기도하는 소리였다. 기도회를 겸한 아침 식사였다. 우린 조금 뜸을 들였다가 인기척이 사라짐을 확인하고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주방에는 미리 다량 부쳐 놓아 다 식어버린 달걀 프라이들, 아무 데서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리얼, 드립 커피도 아닌 그냥 타 먹는 커피, 미리 썰어놓아 변색된 사과 조각이며, 동네 슈퍼에서도 살 수 있는 평범한 식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의 ‘정통 스코틀랜드 브렉퍼스트’라는 말을 떠올리며 우리 일행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게다가 더 우스운 것은 이 속속들이 성의 없는 준비를 한 관리 청년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다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서 그와 함께 식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는 사교적인 대화를 시도해 어색함을 지워보려고 애썼고 우리 중 누구도 과식함이 없이 이 식사를 형식적으로 마치고 올라왔다.
오전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목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자기들도 일정이 있으니 우리의 예상 귀가 시간을 미리 알려 달라고 했다. 숙박업소 주인에게 일일이 귀가 시간을 밝혀야 하는 부자유스러운 관광이 어디 있냐고 따졌으나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잘 굴러가기 위해 당연한 예의라 주장했다. 통화 후 우리는 씩씩거렸다. 그는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전화해서 이번에는, 여행이라는 게 자유롭게 다니는 건데 ‘자기가 좀 지나쳤던 것 같다.’고 사과했다. 이 사과마저 없었다면 우스운 걸 넘어 진짜로 화가 날 뻔했다. 여기만큼 운영자의 편의를 이기적이리만치 내세우는 곳은 본 적이 없다. 누구를 위한 숙소인가? 왜 우리는 돈을 내고 묵는가? 우리는 그래도 이런 일들이야말로 두고두고 추억거리로 남을 거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스코틀랜드를 떠나 우리는 리버풀로 갔다. 에리나는 런던과 리버풀을 오가며 큐레이터로 일했기에 리버풀은 에리나가 오래 살았던 곳이다. 여기에서는 존 레넌의 기타와 안경 옷 등이 전시되어 있는 비틀스 박물관, 그리고 익히 이름을 들어본 뮤지션들은 다 거쳐 갔다던 커번 클럽 등지를 쏘다녔다. 커번 클럽 가는 길엔 비가 적지 아니 쏟아졌다. 그런가 하면 에리나에게 개인적 의미가 있는 식당들이며,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카페도 갔다. 에리나는, 미팅 전에 들러 원피스를 사 입으며 비즈니스적 세팅을 하던 옷 매장도 보여주었다. 그녀의 멋진 삶!
어떤 날은 노스웨일스로 차를 몰았다. 영화 촬영지였을 성곽과 해변이 몹시 멋졌다. 우리는 수프와 빵을 먹고 해변을 거닐었는데 거기엔 ‘영국에서 가장 작은 집’이라는 곳도 있었다.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쌓기도 하고 조약돌들의 갖은 모양새들에 이름을 붙이며 놀았다. 여기는 에리나가 울적할 때 가끔 바람 쏘이러 오던 추억의 장소여서 해변 호텔에서는 그녀가 가면 늘 같은 방을 내어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