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끓여도 열리지 않는 패류가 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바닥을 가진 바다와 자신의 토사물을 끌어안고 울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끓여도 실토하지 않는 조개가 있다. 그럼 어디 이 묵비를, 나의 점진적 붕괴를 조금 증언해 볼까?
어린 행복이 끝나는 시점이 있었다. 어린 내게 ‘주홍글씨’의 가족편이 써지기 시작했던 그 계절도 아닌 계절. 이 사건 이후 나는 언제나 어떤 사각지대나 외곽에 숨죽여 사는 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게 되었다. 여기쯤서 이제는 3인칭으로 말해 볼까 한다. 그렇다고 그때의 여파가 완화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가족은 그 시대에 그리 드물지만은 않은 ‘잔혹극’ 중의 하나였다. 극히 추상화시켜 말하면, 부모님은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그들에겐 당연했던 결혼을 별 준비 없이 겪어내면서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서로 ‘언제나 전쟁 중’인 상태로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내 삶의 완연한 배경이 되어있었다. 부친은 어머니에게 무서웠고 형제들에게 심하게 권위적이었으며 가족 전체에 대한 태도는 매우 자의적이었다. 아버지의 군화 소리는 ‘공포’의 표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시시때때로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드는, 원인불명의 협심증을 앓았다.
열 살 때 그녀의 집은 전세 사기를 당해 훨씬 열악한 집으로 이사 갔다. 불행의 서막이었다. 문제의 시작은 11살의 어느 겨울 그녀가 자고 있다 생소한 촉감에 잠이 깨면서부터였다. 그때 그녀의 몸에는 세상에 처음 보는 액체가 얹혀 있었다. 이때로부터 악마같이 반복되던 상황이 무엇을 계기로 어떻게 종료되었는지는 아무래도 기억에 없다. 그녀는 그 기간을 해리된 채 통과하였던 것 같다.
그녀의 육체는 누군가의 욕망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렸다. 무려 수년간. 이 시간으로 인해 그녀의 정체성은 회복되기 힘들게 일그러졌다. 그는 언제고 그녀를 멋대로 만졌고 그녀는 무기력하게 세상에서 지워져 가면서, 자신을 마땅히 지워져야 할 존재처럼 의식하게 되었다. 극도로 서러운 일이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는가 하면, 어느 날 카톨릭에 입문하자 역시 멋대로 회개하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게도 따라 회개하도록 종용했는데 지금 와 생각하면 그 회개는 억울하다. 그녀에게 회개해야 할 것이 있기나 하던가? 누군가의 노리개로서 하나의 물체나 동물로 대상화되어 육체와 영혼이 강제로 분열되어 버린 그녀에게?
그 자신이 사랑이라 믿은 것과는 달리 그의 터치는 역겨웠고 더러웠고 무책임했다. 실험이라도 하듯 차갑고 분열적이었다. 이런 ‘대상화됨’의 느낌이란 굴욕적 자기 환멸을 일으켰다. 세상에 ‘나’를 규정할 단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녀는 무의식 저변으로부터 가족이라는 둘레를 이탈해 갔다. 문명이라는 그리 견고하지 않은 껍질을 벗겨냈을 때 가족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족이란 대체 어디까지가 순수하게 다정한 관계적 실체일까? 특히 가부장 사회 속 힘의 열세에 있는 딸과 여동생의 위상이란!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유체이탈을 시작했다. 환멸로 넘쳐나는 육체와 굴욕의 역사를 쓰는 정신은 서로 각자 멀어져 갔다. 그녀의 영혼은 툭하면 낮에도 허공에 달려 버릇처럼 야간비행을 하곤 했다. 마음이 죽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없던 일이라 여기며 살라 친다 해도 결코 아무 일도 없던 척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말쟁이라는 자괴감까지 맞물린다. 자기 비하에 시달리고 성적 정체감을 혐오하게 되면서 그녀의 영혼은 불모지가 되다시피 했다. 이후 자기혐오는 물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생장 번식하는 담쟁이가 되어 그녀를 덮치고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