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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Jun 17. 2024

도그빌



    오래전에 지나간 일을 구태여 다시 들먹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현재에 충실하고 앞으로의 날들을 즐기면 될 것을,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나의 목소리라는 게 있기나 하던가? 남이 나의 목에 심어놓은 소리가 그대로 내 목소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누구나 남의 일에 대해선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일에 대해선 가슴에 머무는 법이고, 머리로 판단하는 세계 속에선, 순식간에 멀쩡해지지 않을 사건이나 현상이라곤 없다. 그러나 실제 경험에 대한 느낌은 상당 부분 가슴을 거치게끔 되고, 이는 머리가 이해하는 영역보다 복잡하다. 따라서 더 귀 기울여 숙고해야만 한다.

    

    오래전의 일에 대해 내가 뭐라도 말하려 한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되리라. 무엇보다, 내게 일어난 일을 남들이 그들의 언어로 정리해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애초에 주체가 침범되어 문제가 된 일인데, 그 일의 정리에서마저 또다시 주체가 빠져버린다면, 이 전체 그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총체적 ‘주체 부재’의 문제는 주체를 세움으로써만 해결될 것이다. 주체를 세운다는 것은 막연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주체에게 스스로 말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말이란 곧 존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내 마음의 주소지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는데, 이것에 대해 말하려 하는 동시에 가슴이 덜덜 떨려온다. 언제 놀랐는지도 모르게 다쳐버린 마음이 반응하고 있다. 내가 가만있으면 또다시 언제라도 외부의 존재들이 나를 덮쳐 쓸어가버려 내가 다시 한번 무화될 것 같은 공포. 혹은 내 존재의 깊은 주소지에 대해 타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떠들어대면서 그들이 제시한 전제 위에 날 올려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이런 것들이 어쩌면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으로 불리는 증상인지도 모르지만, 제삼자들은 하나의 사건의 여파가 수십 세월을 건너도록 이렇게나 계속하여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의 인생도 평탄하기만 할 리 없겠지만, 나의 경우 스스로 비극으로 여기는 국면이란, 문제의 사건이 아예 내 존재 의식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는 점이다. 심리적으로 어느 사회에도 속할 수 없게끔 나는 어딘가로 축출되어 버린 것이다. 연신 피워올리는 모닥불 연기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힘껏 내어지르는 함성조차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구조선이 저 멀리 지나가는 걸 하루 한 달 그러다 몇 년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비애. 엄한 상대에게 빼앗긴 나의 존재 정당성을, 잃어버린 세계 전체를 다시 찾아와야만 한다. 고로 증언을 해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 


    혹자들은 잊고 행복해지라고 한다. 하지만 행복은 감각과 감정에 걸친 유포리아. 자아의 경계를 상실한 이후 복구되어 본 적이 없는 자는 사실상 온전한 행복이 불가능하다. 단지 순간으로의 도피만이 가능할 뿐이다. 눈부신 자연이나 좋은 음식, 촉진적인 관계 속으로 계속하여 도피, 아름다운 영향력들에 자아의 부스러기가 반응하면서 기꺼워하는 동안에도 이 부스러기는 그 장소에 부재한 자아를 염려한다. 슬픔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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