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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Jul 23. 2024

떠나는 마당에 시험이라니!



    그즈음 담임 테오도라는 우리에게 프랑스 대학 인증의 어학 시험인 DEF 응시를 권장했다. 이 인증이 우리 인생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일단 봐두라는 것이었다. 테오도라의 강권과 회유는 이중으로 나를 흔들었다. 떠나기 직전인 마당에 시험이라니 스트레스가 몰려오는 한편 솔깃하기도 했다. 


    총 6과목을 준비해야 했다. 테오도라는 이 시험에 대비하여 논술 연습 주제로 부르카burqa 문제, 결혼제도, 흡연, 투우 경기, 불법 체류자 추방 문제 등을 던져 주었다. 부르카로 말하면 당시 사르코지가 이슬람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몸 전체를 가리는 베일을 쓰는 것을 전면 금지한 것에 대해 거센 찬성과 반발이 이어지고 있어서 아주 뜨거운 감자였다. 이 문제는 표면적 이유와 그 배후를 이루는 정치적 이슈가 얽혀 복잡했다. 사실 나는 명분이 뭐건 타인의 복장을 남들이 규제할 권리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작문만큼은 부르카에 대해 상식적 수준의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쪽이 더 쉬웠다. 외국인인 내가 베일 문제로 침을 튀길 일은 없었다. 결혼 주제 또한, 결혼이 사랑을 평생에 걸쳐 완성시키는 수단이라는 둥 찬성 논지를 펼쳤다. 그게 더 쉬우니까.


    이즈음 귀갓길을 같이 걷던 베트남 친구 쑤안은 이 시험 준비로 잔뜩 날이 서서는, 우리 담임 테오도라가 영국 여자애들과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낭비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처음엔 폴리와 케이트가 좋았어. 하지만 이젠 정말....도대체 걔네들은 수업 중에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해. 게다 엠마는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놀아주고 있잖아? 그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소중한 말하기 연습 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엠마가 영국 여자애들과 죽이 잘 맞은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케이티나 폴리 등을 자기 친조카들인 양 몹시 귀여워했다. 그녀는 “마리 크리스틴은 학생들한테 엄마같이 굴지. 하지만 난 결코 내 학생들한테 그래본 적이 없어.”라고 한 적이 있다. 테오는 분명코 ‘엄마’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대신 유쾌하고 괴팍한 이모나 고모의 느낌이 있었다. 또 어찌 보면 그녀는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영국 사람들은 어찌나 루포크loufoque(우스꽝스러운)한지 런던에선 따로 극장표를 살 필요가 없어. 그냥 거리가 다 극장이야!”라는가 하면 “2차 대전 때 프랑스인들은 일부 독일에 협력한 전력도 있지만, 너희 영국 사람들은 시종 좋은 쪽에만 서 있었지.” 하며 두둔하기도 했다.    


    시네마 수업 때 나탈리는 프랑스와 자기 나라 중 어디가 더 좋은지 물었다. 우리가 떠날 무렵이 되니 꺼낸 주제였다. 일본 아이들과 쑤안은 프랑스를 더 좋아했다.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프랑스에서 10년 넘게 살아봐, 그러면 또 생각이 바뀔걸.” 

    나로 말하면 양쪽 나라가 다 거기서 거기다. 염소 치즈나 검은 체리 잼이 무척 좋은가 하면 된장국 냄새를 늘 맡으며 살아야 할 것도 같고, 프랑스의 자연은 아름답지만 석회질 물은 싫다. 프랑스의 관료주의에 신물 나는 한편 우리나라의 몇몇 진보하지 못하는 관점들과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사양하고 싶다.

    예술사 수업도 좋아하는 수업 중 하나였다. 사실 나는 거의 모든 수업을 좋아했다. 나처럼 성실한 학생은 서넛 더 있어서, 태반의 영국 아이들이 결석한 수업을 이 진지한 몇몇 얼굴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미리암은 내가 어쩌다 조금 늦으면 올 때까지 교실 입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럼 그렇지. 조에가 빠질 리 없지.”라면서.


    역사 강의라는 게 옛날이야기나 다름이 없어서, 나는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심정으로 귀를 기울이곤 했다. 어느 날 우리는 피레네 산맥이, 영웅 헤라클레스가 죽은 연인 ‘피렌’을 위해 만든 거대한 무덤이라는 유래를 들었다. 이 수업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영국 아이들마저 감탄했다. “트로 로망티크!”Trop romantique!(너무나 로맨틱하다!)


    들라크르와로 마감된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 진도는 19세기 미술부터 시작되었다. 미리암은 소위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세잔과 부댕, 마네, 모네, 고흐, 고갱을 거쳐서 야수파와 피카소에 이르는,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들의 다양한 미적 관점을 소개해 주었는데 하나하나가 아주 흥미로왔다. 모네나 인상파들의 시각이 노르망디의 습기 많은 환경에 익숙하였으므로, 풍경에 있어 빛이 물에 비쳐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포착하려 했던 반면, 모든 윤곽을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프로방스 지방의 햇빛과 바위산 같은 광물적 풍경에 시각이 길들은 세잔은, 그 안에 영구성을 간직한 것 같은 소위 ‘구조’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처음 접해 보는 것이어서, 수업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으면 몹시 흥분되곤 했다. 


    낭패한 과목도 있었는데 바로 문학 수업이 그러했다. 카롤린은 우리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초반부에 자발적인 발표를 제안했다. 각자가 좋아하는 책을, 친구들에게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게 전달하자는 거였다. 하지만 곧 영국 아이들이 주범이 된 결석의 향연이 이어지면서 수업과 수업 사이의 사슬이 성겨져 갔다. 마침내 그녀는 격한 실망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그녀는 가끔, 그리스 여신을 연상시키는, 비쳐 보이는 긴 원피스에 얇은 숄을 두르고 귀걸이를 길게 늘어뜨렸는데, 수업에 실망한 그녀의 모습은 이 우아한 모습과 맞물려 분노한 여신을 연상시켰다. 


    책 소개 프로젝트는 참여가 저조하여 결국 폴리, 크리스틴, 카트리나, 쑤안에서 멈췄다. 어떤 영국 아이는 한다고 했다가 멋대로 펑크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폴리의 발표는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나도 좋아하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다루었는데, 작가, 문체, 주제, 주제어 등을 차분하게, 청중과 눈을 맞추어 가며 소개했고 특히 폴리 자신이 이 작품의 세계관에 깊이 동화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책상에 편히 걸터앉아 반쯤은 꿈에 잠긴 채 사람들 마음속을 계속해서 오가는 느낌으로 말하던 폴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네르발의 «오렐리아»을 할 요량으로 야심에 찬 원고를 마련했지만 결국 묵히게 되었다. 발표는 취소되었지만, 나는 이 책 표지의 신비한 그림에 매료되어 나중엔 그 원본을 찾아 파리의 구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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