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륙
지난가을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길고 먼 여행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같이 살아온 고양이들이 연로하여 이제는 맡기고 떠날 수 없다.
이륙하면서 끄적였다. 그때의 일기이다.
북유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2019. 9. 4.
가능한 한 짧게 쓰겠다
지나고 나면 변화의 지점이 흐릿해질 것이라, 말뚝들을 몇 개씩 남기는 의미에서, 쓴다.
눈이 나빠졌다.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 이제 독서는 거의 끊기거나 매우 한정적이 되었다.
쓰기도 눈의 변화에 적응시켜야 한다. 문체나 호흡의 변경 또한 예상된다.
생각이나 태도의 흐름 또한.
오후 6시가 조금 안 되었다. 이륙 인사를 할 사람을 떠올린다. 이렇게 적게 이륙 인사한 적이 없다.
이륙 전, 생각이 비행기를 따라 긴 꼬리를 끌며 따라갔다. 꼬리 끝은 피로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피로로부터 깨는 그때에 온 몸이 재생되면 좋겠다. 피로로부터...... 살아서 부활하고 싶다.
또다시 임시 보헤미안이 되자 홀연 집이 적 같다. 그 복잡한 안온. 이렇게 말해봤자 곧 잘 갖추어진 방에서 휴식하게 될 것을.
사진을 적게 찍는 여행이 되어 보아야겠다.
좁은 통로 사이 기내의 밥차가 오가는 동안이다.
이 한정된 공간에 자발적으로 감금된, 다른 데서 마주칠 일 적은 수많은 이들이 제각기 자기 내면에서 상영되는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비행기의 작은 창을 통해, 아름답고 가질 수 없지만 늘 누리는 이 세계 형상들의 대표처럼, 일몰이 곁 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저것은 평소에도 늘 현실 속 비현실이다. 기내의 반수면 상태에서 느낌이 없다가는, 가끔 깨는 순간에 느낌들이 틈입한다. 펄럭이다 멈추는 깃발처럼, 정처 없다 고요하다를 바람의 랜덤에 맡긴다.
아까 비행기를 타러 오면서부터 그간 잃어버렸던 감각들을 돌려받느라, 열 손가락이 벅차다. 기내건 어떤 곳이건, 자궁으로 삼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기어들면, 살면서 부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상의 무의미는 어떤 자리에 놓여 있다가 발각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쳐들어온다. 시시각각 방패를 만들기 시작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무의미의 부속물처럼 무감각의 석회질이 생성된다.
보아줄 사람 눈길은커녕 바람의 살갗도 닿기 힘든 곳에라도 핀다는 꽂은, 피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자연의 곡절에 떠밀려 거기 있는 것이겠지?
고흐는 후세에라도 알려졌지, 그보다 못하지 않으며 또 기구하고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은 또 얼마나 부지기수랴. 인증과 승인, 공유의 범위는 이 넓은 세계에서 생각보다 얼마나 더 미소한 범위로 많은 이들을 소외시키는가.
모든 것이 허용된 듯, 무언가를 획책할라치면 마땅히 그럴 권리가 완전히 부여되어 있지만은 않은 이 지구 게임. 우주 어디에도 없는.
이렇듯 해와 달과 별과 구름을 옆에 흘리며 오래 비행기를 타고 가노라면, 층층이 묻혀있던 마음의 무늬들을 차례로 더듬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