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넘어
유럽 사회 전체의 도덕적 바로미터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혁명과 망명, 가난과 정치적 박해를 모두 겪으며 문학이 현실을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을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다.
위고에게 글쓰기는 감상이 아니라
세상과 맞서는 윤리적 행동이었다.
그의 문장은 풍경을 묘사할 때도
늘 풍경 너머의 인간을 응시했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시선이 가장 장대한 형태로 구현된 작품이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돌아온다. 하지만 사회는 그의 죄를 끝내 놓아주지 않고 그를 끊임없이 과거에 묶어둔다.
그때 한 명의 사제가 그에게 건넨
“당신은 더 이상 악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장발장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린다.
그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코제트를 지키며 한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자베르라는 경찰은
법의 질서라는 절대적 기준으로
그를 끝까지 추적한다.
용서와 정의, 자비와 원칙이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진실에 도달한다.
<레미제라블>은 혁명, 빈곤, 폭력, 제도의 실패 같은 거대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결국 한 인간이 어떻게 선량해지는가라는
작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위고는 인간의 선함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선함은 우연히 도착하는 빛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망설임 속에서
고통스럽게 다져지는 힘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의 진짜 중심은 장발장과 자베르 중 누구도 아니다. 오히려 둘의 충돌 사이에 놓인 정의의 두 얼굴을 바라보는
독자의 사유, 자체다.
위고는 묻는다.
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런 질문은 시대가 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에도 여전히 울림을 가진다.
구원은 이 소설의 정서적 축이다.
장발장은 타인의 손길을 통해
과거의 자신에서 구원받고
코제트를 통해
삶의 의미에서 구원받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용서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구원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위고에게 구원이란
누군가를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를 동일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배려(Sorge)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돌봄의 실천으로 보았다.
구원이란 돌봄의 절정으로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행동이다.
장발장에게 사제가 건넨 은촛대는 배려의 상징이다.
심리학, 애착이론과 회복탄력성
애착이 안정될 때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코제트와의 관계는
장발장이 오랜 상처를 넘어서는
정서적 안전기지가 된다.
구원은 곧 건강한 관계의 복원이다.
신학, 아가페적 사랑
자비와 무조건성,
두 개념이 합쳐질 때
사랑은 구원의 힘을 갖는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위해 선택하는 삶은
아가페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레미제라블>은
고통의 시대 속에서도
한 인간이 타인의 손길과 자신의 선택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구원에 관한 가장 광대한 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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