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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붉은 수수밭〉

피와 생명이 동시에 자라는 땅

by Henry




모옌의 소설은 향기로 시작해 피로 끝난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earthy 한 문장,

흙·피·땀·태양·식물의 냄새를 가득 품은 세계.

거칠고 뜨거운 세계 속에서

<붉은 수수밭>은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잔혹해지고

어떻게 살아남는지 묵직하게 묻는다.


빨갛게 익은 수수는

풍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피의 은유다.

모옌은 이 모순적인 상징을

어떤 미화도 없이 그대로 펼쳐놓는다.

사랑과 폭력, 욕망과 희생,

웃음과 죽음이 한 땅에서 섞이고 발효되는 세계.

그 세계는 문명보다 생명에 가깝고

도시보다 인간의 뿌리에 더 가까운 자리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익명의 농민들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견뎌야 했던 전쟁과 폭력이 있다.

그들의 삶은 고단했지만

억눌리지 않은 생명력이 있었다.

생명력은 붉은 수수의 줄기처럼

태양 아래에서 억세게 흔들리며

어떤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으려 한다.


모옌은 개인의 고통을

역사적 비극의 한 조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때로는 잔혹할 만큼 정직하게 기록한다.

정직함 덕분에

이 소설은 역사보다 더 진짜 역사처럼 읽힌다.


<붉은 수수밭>의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위대한 선택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사랑하기 위해 버티고

내일보다 오늘을 지키기 위해

수수밭 사이를 달릴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몸짓들은

전쟁의 잿빛 풍경 속에서

기적처럼 빛난다.


모옌이 보여주는 폭력은

잔인한 것이 아니다.

폭력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사랑을 하고,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살아남는다.

소설 속 붉은색은

피의 색이면서

사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색이기도 하다.


<붉은 수수밭>이 우리에게 남기는 건

비극이나 역사적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

본능처럼 붙잡고 싶어 했던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려고 애썼던 감정들의 흔적이다.


수수밭은 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흔들린다.

흔들림은

폭력과 사랑, 전쟁과 일상, 죽음과 생명의

모든 경계가 섞여 일렁이는 인간의 삶을 닮아 있다.


모옌은 그 흔들림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은 잔혹함 속에서도 사랑을 버리지 않으며

사랑이 있는 한 삶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붉은 수수밭은

모든 것을 견뎌낸 인간들의 심장과도 같다.

딱딱하지만 뜨겁고

잔혹하지만 끝내 살아 있는 우리의 심장이다.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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