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0시, 러닝.
요즘 나의 러닝 루틴 중의 하나다. 둘째 녀석 학원 데려다주고 끝나는 시간까지 러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소중한 시간이다. 감사하게도 최근에 학원 시간이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어서, 좀 더 여유롭게 장거리를 뛸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도 러닝복을 입기 전에 날씨를 봤다. 전날 밤에 확인했을 때는 오전부터 비가 내리는 걸로 되어있어서, 우중런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해 보니, 오후 1시쯤부터 비가 오늘 걸로 바뀌었다. 아 뭐 입고 나가지? 기온상으로는 반팔 반바지가 알맞은 날씨였고,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일기예보라는 게 어디 항상 곧이곧대로 다 맞는 게 아니지 않은가. 비가 더 일찍 내리기 시작할 수도 있고 더 늦게 내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나는 러닝 후 아이를 다시 학원에서 픽업을 해야 하는데 비에 홀딱 젖은 생쥐꼴로 사람 많은 학원 복도를 서성거릴 자신이 없었다. 물론 비 맞은 바람막이 하나 더 입는다고 내가 일반적으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비에 젖은 반팔차림보다는 조금은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에 위에 바람막이를 하나 걸쳤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10시부터 뛰기 시작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으며, 역시 예상한 대로 더웠다. 아, 바람막이 벗고 싶다... 500m도 가기 전부터 이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횡단보도 빨간불에서 바람막이를 벗어서 허리춤에 묶었다. 한 번 묶으면 쉽게 풀리니까 쫀쫀하게 두 번이나 묶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바람막이를 허리춤에 묶고 뛰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다리에 계속 부딪쳐서 걸리적거리고, 뛰면 뛸수록 바람막이가 허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어 꽤나 신경이 쓰인다. 횡단보도를 지나고 천변으로 내려와서 2km쯤 되었을 때 공사장을 지나고 있었다. 공사장 초입에 신호수로 보이는 아저씨가 계셨는데, <아, 옷 맡기고 뛸까?>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 물어나 보자.
<사장님, 이거 옷 좀 여기 두고 갔다가 이따가 좀 찾아갈 수 있을까요?
그냥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두고 갔다가 알아서 들고 갈게요>
그렇다, 아저씨보다 사장님이 뭔가 더 정중해 보이지 않는가?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사장님(?)은 흔쾌히 내 부탁들 들어주셨다. 게다가 자기는 11시 30분에 점심시간이라 이따가 여기 없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고, 나에게도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사진 좀 찍어 주세요>
본인 스마트폰을 켜서 나에게 건네주는데, 보아하니 무슨 출근 기록 앱 같아 보였다. 이걸로 출퇴근 인증을 하는 그런 시스템인가 보다. 나도 흔쾌히 사장님이 공사장 초입에 서있는 모습을 찍어 드렸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옷을 맡기는 나의 마음도 좀 가벼워졌다.
반환점을 돌고 다시 돌아오면서, 공사장 입구가 여기인지 저기인지 좀 헷갈리기는 했지만, 무난하게 옷은 잘 찾았다. 무슨 고가도로 공사현장 같은 곳인데, 공사장 입구가 천변을 따라 여러 군데가 있어서 조금 헷갈렸다. 게다가 사장님은 11시 30분이 넘어서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옷을 찾아서 다시 허리춤에 묶고 나머지 2km를 뛰기는 뛰었는데, 다시 바람막이를 허리에 두르니, 뛸 의욕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 아, 거추장스럽고 덥기까지 하다. 물론 입은 건 아니지만 다리에 닿는 촉감만으로도 덥다.
비 오기 전 날씨니 습하긴 또 엄청 습했으니까.. 그래도 꾸역꾸역 2km를 더 뛰어서 총 16km를 뛰었다. 결국 16km 중 12km는 바람막이 없이 편하게 뛴 셈이고 사장님 덕분에 홀가분하게 잘 뛴 감사한 러닝이었다.
러너라면 누구나 옷 맡길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여름이면 여름, 겨울이면 겨울, 환절기면 환절기... 뛰기 전 후에는 뭘 더 입거나 벗거나.. 옷 보관할 곳이 필요하다. 뛰다가 더워서, 옷 벗어서 풀밭에 숨겨 놓을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천변보다는 트랙이 더 좋기는 하다. 뛰면서 옷도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고 물도 편하게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공사장이 이렇게 반갑고 고맙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