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도 너무 덥다. 7월 초순 기온이 거의 역대급으로 더운 수준인 것 같은데, 더 무서운 사실은 앞으로 여름이 더 더워지면 더워졌지 시원해질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몇 주 전 토요일 아침에 러닝을 했다. 오전 10시였지만 벌써 기온이 30도에 가까웠다. 천변에 산책로가 뚝방 위쪽, 그리고 천 바로 옆 이렇게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 날은 천변 위쪽 길로 뛰었다. 나무 그늘이 있어서 땡볕일 때는 여기가 더 뛰기 좋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길로 뛰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이쪽 길은 내게 그리 친숙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뛰다 보면 다리가 있는 교차로 같은 곳에서는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길이 다른 곳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 날도, 처음 가본 길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는데, 앞서 가시던 러너분이 왼쪽 길로 가시길래, 나도 그냥 왼쪽길로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갈림길이 나왔는데, 왼쪽은 트랙 운동장이 보였고 오른쪽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이 나왔다. 아까 내가 따라왔던 러너분은 이미 내 뒤에 계셔서 이번엔 오롯이 혼자서 판단을 해야 했다.
그래, 모르는 길보다는 아는 곳이 낫지. 주저 없이 왼쪽 길을 택했고 트랙으로 뛰어 내려갔다. 오랜만에 트랙이나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트랙에는 러닝클래스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서, 심심하지 않게 트랙을 뛸 수 있었다.
10km쯤 거리를 채우니, 러닝클래스 하시는 분들은 끝나고 다들 사라지셨고, 트랙 축구장에 공차는 남학생 3명과 나, 그리고 혼런하시는 러너 2분 정도 계셨다. 너무 더워서 10km쯤 뛰고 트랙 스탠드에 벌러덩 누워서 한 10분 동안 쉬었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는데 물도 없고, 자판기가 보였는데 신용카드도 안 되는 것 같고... 집에 갈까 하다가 5km만 더 뛰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쉬면 퍼질 것 같아서 정신 차리고 일어섰다.
그늘 하나 없는 트랙을 보다가 문득, 상탈런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끔 천변에 보이는 상탈러너분들 보고 부럽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고, 트랙이니 옷을 놓고 뛸 수도 있다. If not now, then when의 정신으로 옷을 훌러덩 벗고 트랙을 뛰었다.
아, 시원하다. 적당히 땀 흘린 피부에 닿는 공기가 아주 시원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상의 탈의하고 뛰어본 건 군대 이후 처음이니까 정말 20년도 더 되었구나. 시원하고 좋긴 한데, 뛰면서 살이 탈까 좀 조바심이 낫다. 집에서 싱글렛을 입고 팔이랑 얼굴, 목에만 선블록을 발랐는데 옷을 벗으니까 선블록 안 바른 부위들이 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5km 더 뛸 거고, 그 정도면 30분도 안 걸리는데 뭐 타면 얼마나 타겠냐라고 머릿속으로 희망회로를 돌리며 뛰었다. 다음부터는 옷 안에도 썬블럭을 발라야겠다고 다짐하면서...
5km를 다 뛰고 옷을 벗어 놓은 트랙 스탠드에 와보니, 싱글렛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바짝 말라있었다. 와, 이 정도로 바짝 마를 줄 몰랐다. 땀에 젖은 옷 찝찝하게 어떻게 다시 입고 집에 가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말 덥긴 덥구나.
사실, 상의 탈의하고 뛰는 것에 호불호도 있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준다던가, 경범죄라던가 그런 이슈들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름엔 좀 봐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몸매가 안 좋은데 옷을 벗으면 안구테러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는 언어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누구나 옷을 벗을 권리도 있고, 비키니나 레깅스를 입을 권리가 있다. 남들 보라고 입는 것도 아니고, 입어도 된다 안된다의 기준 또한 명확하지도 않고 법적 근거도 없다. 나는 정말 그런 말들을 너무 혐오한다.
법적으로 경범죄에 해당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여러 대회에서 상의 탈의 하고 뛰시는 분들이 여럿 있다. 아마 상의 탈의가 경범죄에 해당한다면, 대회에서 상의 탈의를 막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회 때는 되고 평상시 천변에서는 안 되는 걸 수도 있을까? 잘 모르겠다. 사실 과다 노출에 의한 경범죄 기준 또한 애매하다. 공공장소에서 성기, 엉덩이, 주요 부위를 노출하는 행위는 경범죄라는데 남자의 상의 탈의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의 젖꼭지는 주요 부위인가 아닌가, 경찰 혹은 유튜버 선생님들이 팩트 체크 한 번 해주시면 좋겠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너무 더운 날, 온몸에 썬블록 잔뜩 바르고 상탈런 또 하고 싶다.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니 또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