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고 산다 vs 누리고 산다

by 허훈

세상은 참으로 상대적이다. 이 이치를 깨닫는 순간,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태어남의 기쁨보다 더 큰 울음으로 시작했으니, 마땅히 잘 놀다가 마지막에는 환한 웃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일 터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진리 앞에서 얼마나 자주 조바심 내고, 긴장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살까?




최근 TV를 보다가 문득 그 아이러니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반려동물 천만 시대, 반려견을 자식처럼 여겨 키우는 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사랑은 당연한 감정이다. 문제는 그 사랑의 방식에 있다. 규칙 없이, 무한정 애지중지 이뻐만 하니 어느새 반려견은 집안에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개는 개로서의 행복을 잃고, 주인은 상전을 모시듯 비위를 맞추느라 안절부절못하며 힘들어한다. 함께 살아야 할 관계가 모시고 사는 관계로 변질된 것이다. 견주는 지치고, 반려견 역시 혼란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식처럼 여긴 그 순수한 마음이,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비단 반려동물과의 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새 차를 구입했을 때의 그 설렘,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긴장감으로 바뀐다.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먼지라도 묻을까,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물론 아끼는 것은 당연하다. 귀한 것은 소중히 다뤄야 한다. 문제는 그 소중함이 사용의 목적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차는 이동의 편리함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산 것인데, 어느새 차를 모시고 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사소한 흠집 하나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막 다룬다며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순간, 그 새 차는 기쁨의 상징이 아닌 조바심의 근원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귀한 것들이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건강, 재산, 명예, 심지어 시간까지도. 우리는 그것들을 잃을까 두려워,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모시거나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한다.

우리가 천년만년 사는 존재도 아닌데,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데, 왜 이토록 조바심 내며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완벽하게 지키려다, 완벽하게 즐기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매 순간 긴장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훅 하고 삶이 끝나버리면 그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아, 좀 더 누릴걸. 좀 더 웃을걸."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물론 함부로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임감을 버리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소유의 목적을 되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반려견은 진정한 교감과 동행을 위해, 차는 자유와 편리함을 위해, 건강은 활기찬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지키고 모시느라 정작 가장 소중한 순간의 나의 평온함과 함께 사는 이들의 행복을 잃는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삶이다.


이제는 멈춰 서서, 나를 둘러싼 60조 개의 세포를 이완시킬 때다. 손 안의 반려견이 편안하게 코 골며 자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새 차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하는 순간의 자유를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이자 동반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순간, 당신의 심장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고 있다는 사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기적이다. 불안과 긴장의 끈을 내려놓고, 그 기적을 두려움 없이 마음껏 누리는 삶. 울면서 온 세상, 이제는 웃으며 즐기다가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그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오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누려 보자.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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