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

처음 받아본 사과.

by 여니


둘째 동생에게 미안한 것들 중 하나, 지켜주지 못한 것.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업적들 덕에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잦은 반항들과 가출을 일삼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구타들이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잘못을 했든, 하지 않았든 욕을 먹고 맞는 것은 일상이었으니까.


집이 너무 싫었다. 불안하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습관처럼 연필이나 휴지, 쿠션모서리를 씹어대곤 했다. 나에게 빠져있는 시간 동안 아버지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여름이었다. 여동생의 옷차림이 유아용 민소매 청꽃무늬 원피스였으니.

아버지는 사교모임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여행약속을 많이 잡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지인들과 1박 2일 바캉스를 다녀오는 약속을 잡았다. 엄마는 막냇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동행하지 못했고 나는 합류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독 물놀이를 좋아하던 여동생은 아버지를 따라가겠다며 나섰다. 그에 별 생각이 없던 나는 조심히 다녀오란 말을 전하고 하루동안 아버지 없는 집이 자유라는 생각에 숨통이 트였다.


다음날 이른 오후, 여행을 다녀와 귀가한 아버지와 동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로 부산스럽게 엄마를 찾았다. 그간 조용했던 집이 또 시끄러워질 거라 예상되어 듣고 있던 음악소리를 한층 더 키우고 방 밖을 나가질 않았다. 몇 분 지났을까 거실에서 큰소리가 나길 시작했다.


'역시 조용한 날이 없네.' 하며 그제야 방문밖을 나가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들어온 광경은 여동생이 지레 겁을 먹은 듯 엄마옆에 딱 붙어있었고, 엄마는 화가 많이 났는지 생전 처음 보는 발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언가 부정하는 듯 아니라고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매우 좋지 않은 예감을 선사했다.


서둘러 상황에 개입해 엄마를 진정시키고 무슨 일이냐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여동생을 동승자석에 앉혀 운전을 하며 왔는데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동생의 원피스를 들쳐 올려 가슴을 만지면서 왔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말들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살인충동'이었다.


‘나로서는 부족해서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아이에게 이딴 더러운 짓을 반복하여 제2의 피해자를 만들어 냈다.’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정신을 반쯤 차렸을 땐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는지 넷째 고모와 고모부를 호출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오신 두 분이 무슨 일이냐며 묻자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고모는 소리치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그저 아무 말하지 않고 TV만 보고 있었다.


길어질 것 같은 어른들의 대화 속 나는 동생과 함께 침묵을 유지했다. 피해자들이 개입되지 않는 대화. 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으리라 속으로 직감했다.


솔직히 크나큰 기대조차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아버지손에 얻어터지던 엄마를 살려야겠단 생각으로 집전화기를 들어 경찰서에 신고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이 출동하고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진이 다 빠져 널브러져 있는 엄마를 보호하기는커녕 다쳤으면 병원에 가보란 말만 하고 “경찰은 부부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 원만하게 해결해라.”주의를 주는 게 끝이었다.


그런 환경을 너무 잘 알고 있던 탓이었을까? 이 집을 떠나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어리고 무능하게 느껴졌다.


어른들의 대화가 끝이난 뒤 그제야 나와 여동생에게

"아빠가 또 그러면 전화해."라는 말만 남기고 두 분은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주야장천 담배만 태우고 되려 화를 내고 있었다. 감정이 조금 추슬러 들었는지 진정이 된 엄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미안해."

살면서 처음 들어본 사과였다.

이전 04화나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