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졌던 마음이 조용히 다짐으로 바뀌는 순간
Philip Glass – “Opening”
정말 좋아하는 책이 한 권이 있다.
박웅현 작가님의 『여덟 단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특정한 문장 하나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 전체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오랫동안 흐릿했던 창문을 누군가 말끔히 닦아낸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경험이었다.
'자존', '본질', '고전', '견'…
단어 하나하나에 삶의 밀도와 감정의 결이 느껴졌고,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그 단어를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하다" 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 단어들을 진정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멋진 개념으로만 간직하고 있는가?
그랬던 작가님을
얼마 전, 만나 뵐 수 있었다.
실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을 때의 설렘은
마치 어린 시절 처음 동경하던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와 비슷했다.
와인을 마시며 나눈 대화는 가볍지 않았고,
내 삶의 결을 찬찬히 돌아보게 만드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작가님의 말 한마디,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방식,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들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존경'이라는 마음의 실체를 조용히 마주했다.
책 속에서만 만났던 그 단어들이
작가님의 일상적인 대화와 표정, 손짓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음을 목격했고,
그것은 글자가 아닌 살아있는 경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 안에서 작은 떨림이 생겨났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일 수 있을까?"
유일하게 모두에게 조건 없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그렇기 때문에 유한하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이 시간을
내가 아니라면, 작가님은 더 중요한 작업이나 더 중요한 관계를 위해
쓰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나에게 기꺼이 내어준 시간의 의미를
그 순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감사와 함께 조용한 미안함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 무언가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자리는 여전히 '받는 쪽'에 가까웠다.
마치 숲 속의 어린 나무가 큰 나무의 그늘 아래 서 있는 것처럼,
나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에서 작아지기보다는
어떤 방향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돌리는 경험을 했다.
단지 "닮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은 단순한 포부가 아니라,
작가님과의 만남이 내게 남긴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받은 의미 있는 시간을,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도 나눌 수 있기를.
특별한 자리에 잠시 머물렀고,
나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