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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Mar 20. 2018

6화 느긋한 인간의 하루


마감이 있지 않은 한 조급할 일이 거의 없고 가까이서 마주하며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이 직업의 큰 축복이다(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주로 나다).

잘은 모르지만 회사 생활의 어려움 중 대부분이 대인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든지 내가 벌인 일도 아닌데 해야 하는, 그런 목적 모를 업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일러스트레이터란 꽤 괜찮은 직업인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더 느긋한 사람이 되었다. 어디서 닥칠지 모를 공격에 대해 미리 방어 태세 같은 것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히 누굴 보든 미운 눈으로 볼 필요도 없어졌다.



천천히 동네를 걷다 보면 평소엔 흥미조차 없고 바쁠 땐 더 더욱 볼 수 없는 생명체들의 귀여움이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의 카페에는 아이를 등원시키고 한숨 돌리는 학부모들이 많은데 제법 큰 아이들을 둔 엄마들은 주로 무리를 지어 기세 좋게 수다를 떤다. 어느 학원이 좋다, 어디 학교로 진학하는 게 좋다 등등 대부분 아이들의 학업에 대한 이야기라 내 귀에는 영 지루하지만 가끔 들려오는 남편 흉은 듣는 재미가 좋다.

반면 멍한 얼굴로 유모차를 슬렁슬렁 밀면서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초보 엄마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샌드위치라도 한입 베어 물라치면 때맞춰 터지는 아기의 울음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참 귀엽다.



한낮에 공원으로 이어진 개천에는 노인들이 많다.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허리춤에 야무지게 달고 경보하는 할머니, 운동기구가 아닌 곳에 용케 줄줄이 매달려 다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노인들, 커피나 생수 따위를 파는 이동식 카페(?)의 주인 할머니 등등. 그런 노인들을 구경하며 자전거를 슬슬 밟다 보면 뒤에서 쌩하고 건장한 노인이 자전거와 함께 지나간다. ‘건장한 노인’이라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실제로 개천이나 뒷산에 나가보면 젊은 나보다도 체력이 좋아 보이는 노인 및 시추와 몰티즈들이 그득하다. 알 수 없는 경쟁심과 부끄러움이 함께 느껴지곤 한다. 동시에 생에 대한 의지란 저토록 강한 것일까, 건강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지금은 가지고 있지만 언젠간 사라질 나의 건강이라든지 젊음이 조금은 아련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할머니가 된다 한들 이분들처럼 성실히 내 건강을 돌볼는지는 모르겠다.



형형색색의 운동복과 각양각색의 건강법을 구경하며 도착한 공원에는 유치원에 보낼 수조차 없는 작은 사람들이 많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비둘기를 쫓거나 이유 없이 꺅꺅거린다. 알 수 없는 지지를 볼에, 손에, 사방에 묻힌 채 헤헤 웃기도 하고 집히는대로 닿는 대로 입에 넣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그럴 때 황급히 제지하는 엄마의 표정도, 엄마 마음 따위야 신경 쓸 것 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꼬마들의 표정도 무척 귀엽다.

얘네가 커서 나같이 큰 사람이 되는 것일까 생각하면 약간 씁쓸해지지만 그래도 이미 태어난 이상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런 운명의 메시지를 눈으로 전달해보기도 한다. 물론 상대가 알아주진 않는다.



오후가 되어 동네로 다시 돌아오면 학생들이 참 많다. 옆구리에 축구공을 끼고 무리 지어 지나가는 남학생들은 아주 빼빼 마른 아이부터 통통하니 건장한 아이 등 정말 다양하다. 이 녀석들이 커서 대학에 가고 여자 친구도 만들고 알바하고 나중엔 회사에 다니겠구나 하는 이상한 진로를 상상할 때도 있다(상상력이 부족하여 늘 상투적인 진로만 생각한다).

때로 대범한 학생들은 하굣길에 이성 친구의 손을 다정히 붙잡고 거닐기도 한다. 카페에서 알콩달콩 교복을 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옛날 사람 같지만, 십여 년 전 나는 고작 집에서 만화책 <아즈망가 대왕>이나 <아따맘마>나 보던 학생이었다. 그래서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 커플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은 아직도 내게는 생경한 풍경이다. 어른의 연애는 가까이 달라붙어 걷더라도 어딘가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는 그런 무심한 구석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이들의 연애는 고작 손 정도 잡아놓고선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친구들도 많고 어색하게나마 가까이 붙어도 두 얼굴에 쑥스러움이 가득하다. 귀여운 모습이다.

 


떡볶이 가게 앞엔 초등학생들이 쭈글쭈글한 1,000원짜리를 들고 슬러시를 기다리면서 장난을 치고 있다. 자전거도 야무지게 주차해놓고서는. 개중에 넉살 좋은 녀석들은 떡볶이를 퍼 담고 있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말도 건다. 비즈니스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떡볶이집 아주머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정말 정성스럽게 들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작은 비밀을 곧잘 꺼내놓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몰래 엿들은 대화 중 하나는 엄마한테 말은 못 하겠지만 솔직히 이불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덮어야지. 샀는데 어쩌겠니” 정도의 응대를 상상했는데 놀랍게도 아주머니는 “와, 그거 좀 싫겠다. 무슨 색인데?” 하고 대꾸하였다. ‘대화란 저렇게 하는 것일까!’ 하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그분은 상당히 멋진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밤이 되면 약속을 끝내고 귀가하는 내 또래의 사람들을 많이 본다. 나는 약속이 있지 않은 한 화장도 하지 않을뿐더러 옷은 그야말로 ‘자연인’의 차림새로 다니기 때문에 멋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약속을 끝마친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낮 동안 흩뿌린 멋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가 특히 구경하는 것은 주로 내 또래 여자들이다. 그녀들이 지나갈 때면 속으로 ‘와, 예쁘다’ 할 때도 있고, 지나가면서 남긴 잔향에 뒤돌아볼 때도 있다.

털레털레 걸어서 다시 집에 돌아오는 길의 횡단보도에서는 초록 불임에도 쌩하고 자전거가 달려간다. 성질을 팍 내려던 차에 “아가씨, 미안해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아저씨 뒷모습이 귀여워서 봐주게 된다.

 


낮 동안 내가 멀끔히 치워놓은 집에 퇴근하고 돌아온 가족들도 구경할 수 있다. 온종일 얄밉게도 팡팡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가족들을 반기는 개들의 표정도 본다. 천천히 살펴보면 네가 나고 내가 너인 듯 다들 비슷하게 사는 것 같다. 아주 남처럼 느껴지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불쑥 다가가 아는 체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나만의 적당한 거리에서 느긋하게 사람들을 바라보면 미워할 것은 적어지고 구경할 귀여운 것은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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