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령 Mar 27. 2018

7화 실연 요정


실연 요정의 존재에 대해 내가 체감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얼마간 교제를 했던 친구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였다.

당시에 내가 맡았던 작업도 복잡하고 힘들게 흘러가고 있었던 탓에 

교제한 기간에 비해 비교적 큰 실연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사로운 일로 마감을 미룰 수도 없을뿐더러 일도 정말 무지하게 많고 

또 어려웠기 때문에 실연의 고통은 배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멀리 남산타워를 보며 눈물지었고 때로는 응앙응앙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다.

그래야 또 작업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몇 컷 그리다가도 생각이 나면 

다시 남산타워를 보며 “네가 어떻게!” 타령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앉아 그림을 그렸고 

그 지질한 타령을 수차례 반복하며 며칠을 보냈다.

차라리 맥주라도 마셨거나 친구랑 시원하게 놀러라도 갔으면 금방 이겨냈을 텐데 말이다.

일에 발목을 붙잡혀 실연 후의 일분일초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 열흘 가량을 보내고 난 어느 새벽,

여느 날과 같이 작업을 힘겹게 마무리 짓고 자리에 누웠다.

베갯잇을 조금 적시다가 마감까지의 작업량을 계산한 후에 알람을 맞췄다.

그러고는 지쳐서 곯아떨어진 것까지 똑똑히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무슨 일인지 어제 울다 그리다 하던 나는 어디에 가고 어디선가 

기력이 충전되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남산타워를 찾지도, 울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너무 신기했지만 ‘어라? 괜찮네?’ 하고 말하는 순간 왠지 부정 탈까 싶어 함구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도 나는 너무 괜찮았고 그렇게 실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막을 내렸다.

그때 나는 ‘이건 분명 실연 요정이 다녀간 것이다!’ 하고 실연 요정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했던 실연 또한 그랬다(많지는 않지만……).

헤어지고 나면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방구석에서도,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볕이 뜨거운 날에도 팡팡 울던 그런 처량한 인간이었다.


“나쁜 녀석”, “괘씸한 녀석”(순화하여 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하며 

얼마간 저주하다가 어느 날엔가 갑자기 괜찮아져서는 “그래, 좋은 추억도 있었지”라든지 

“그 친구 덕분에 그래도 이런 인생 팁을 깨달았구나” 하는 속 좋은 소리가 불현듯 나오는 날에 도달해 있었다.

새로운 사람으로 상처를 치유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도 아니었고,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부지불식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 있었다.


실연 요정이 와서 ‘뾰로롱’ 하고 내 머리 위로 요술봉을 휘둘러 준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 감쪽같이 괜찮아진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실연 후에 힘들고 지옥 같은 시기를 겪는 친구들에게는 늘 이런 소리를 한다.

지금은 지옥 같지만 그냥 포기하고 슬프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면 실연 요정이 자는 동안 너를 찾아와서는 머리 위로 요술봉을 휘두른다고 말이다.

 

조금 정성껏 휘둘러주면 그간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나 허탈할 정도로 마음이 멀끔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실연 요정이 요술봉을 대강 휘두르고 가는 것인지 다소간의 상처는 남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는 못 돌아갈 것 같던 일상으로 돌아가게는 되지 않는가.

게다가 새로운 사람은 절대 못 만날 거라 슬픈 장담을 하던 친구들도 결국엔 

새로운 사랑 혹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다. 나 또한 그랬다.



다만 실연의 경험이 쌓일수록 요정은 요술봉을 세게 휘두르고 가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니 실연이 두려워 연애를 삼갈 일도 아니고 실연 후에 괴롭더라도 

함부로 “다시는 사랑 안 한다”는 식의 엄살도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연 요정이 정말로 어느 날엔가 와서는 요술봉을 휘둘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내가 사춘기 첫사랑에게 차였을 때 친구가 해줬던 말을 적고 싶다.

그녀는 메일로 이런 내용을 보내왔는데 그 글은 아직도 내게 은근히 기운을 북돋아준다.

내용인즉슨, 지나가는 평범하디 평범한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풍파를

거치고서 저렇게 평온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실연 후에는 다시 사랑 따윈 못 할 것 같고 숨도 못 쉬게 슬픈 날들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수 차례 경험하고도 저렇게 멀쩡히 사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잭필드 바지를 입은 아저씨도,

마트에서 만난 기모 밴딩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도 소싯적에 이별 몇 번 해본 사람들이리라.

실연 후에 숨도 못 쉬게 힘들고, 마음 아파서 다시는 사랑 따위 못 할 것 같은 분들은 

우리네 평범한 중년들을 돌아보면 조금 마음이 풀어질 거예요.


게다가 우리에겐 실연 요정이 있다니깐요?





*바로 오늘! 27일 저녁 7시30분 부터 90분간 저와 만나실 수 있습니다.

북바이북 블로그에서 신청하실 수 있고, 상암동 북바이북 현장에서 바로 신청도 가능하세요!

퇴근하고 적적한 분들 모두모두 모여서 각자의 리듬대로 놀아보아요 :-)



북바이북 상암 신청링크! (클릭!)


책 만나러가요! (클릭!)

이전 06화 6화 느긋한 인간의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