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던질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질문은 역시 취향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근황에 대하여 물어봤자 상대의 이전 생활에 대해 알고 있던 것도 아니니 답을 들어도
그에 대해 별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고 가족이나 주변인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실례일
테니까 간편하게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좋다.
겸사 단답도 피할 수 있으니 아이스브레이킹 용으로 썩 적합한 질문인 것이다.
다만 대답하는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해보면 사실 이 질문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고작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뿐인데 내 대답으로 말미암아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때만큼은 마치 무언가를
선포하는 기분이 되어버린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만 대답하게
되면 나는 그것의 속성을 그대로 담은 인간이 되어버린다.
“저는 보사노바를 좋아합니다”라고 답한다면 나는 재즈만 듣는,
그것도 봇싸-노우-바만 고집하는 교양 있는(?) 어려운 인간이 되어 있다.
사실 차 안에서는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에 맞추어 어깨춤을 추고
설거지할 땐 나훈아의 <고향역>이나 설운도의 <누이>도 곧잘 듣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장황하게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자.
“저는 보사노바를 즐겨 듣지만 차 안에서는 종종 흘러간 가요를 듣기도 하고
집안일을 할 때엔 트로트도 종종 들어요. 어릴 땐 얼터너티브 록이나 브릿팝 종류를 많이 들었지만요.
아, 참, 비틀스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가을엔 비틀스예요. 겨울엔 시나트라 풍의 재즈가 좋지만요.”
아, 자의식 과잉이다.
8초 분량의 대답을 상상한 질문자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을,
20초도 넘게 답변하는 퍽 재수 없는 답변자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즉, 취향을 묻는 말(음악 외에도 자매품으로 영화, 미술, 음식 등이 있다)에 적당한 길이로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끔 대답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대답 전이나 후에 “별로 특별한 건 없지만”이라든지 “어렵네요. 잘 모르겠어요”
같은 말을 잘 덧붙인다. 뭐랄까 문이 열려 있도록 받치고 있는 문 받침용 말 같은 것. 나도 그렇다.
어떤 대답이 적절할지 수년째 고민하는 중이지만(석 달에 0.5번꼴로 하는 고민이라 수년이나 지나버렸다)
별다른 묘안이 떠오르지도 않았을뿐더러 내 취향이 굽이치는 강가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는 탓에
아직도 답은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팁을 조금 찾았는데 하나는 너무 극단으로 보이는 대답은 피하는 것,
그리고 그런 대답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상대를 보아가며 대답을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봤고 꽤 즐겁게 본 까닭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상대를 가려가며 대답을 한다.
만약 이 대답을 했을 때 나를 홍상수 감독이라는 집합에 ‘속한다’ 정도로
상대가 이해해버릴 것 같다면 그냥 무난하게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팁으로는 싫어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좋아하는 것에 대해 대답하는 방법이 있다.
“웬만한 영화는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잉치키 잉치키 뚜쉬뚜쉬 피유우우우웅 퍽 하는 영화는 안 봅니다.
<블레이드 러너>만 빼고요.” 그러나 이 또한 다른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좋은 대답은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통해 나를 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취향을 통해 어떤 사람을 파악하려는 것은
그게 그 사람을 알기 위한 지름길 정도이기 때문이지
대단한 의미를 두고 하는 질문은 아니니 이렇게나 고민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길고도 장황한 설명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든 답변자로서 이런 고충을 경험해봤을 터이니
누군가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말자는 것이다.
사람이란 불가해한 다면체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봤을 땐
분명 삼각형인 줄 알았는데 저쪽으로 봤더니 오각형이고 뭐 그렇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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